9일 오후 경기 시흥시 C아파트 서모(61·여)씨의 집. 이날 친구이름으로 신용카드를 몰래 발급받아 거액을 사용한 서씨를 긴급체포하러 온 형사들은 난감한 표정이었다. 서씨가 폐암말기증세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중환자인 데다 대소변을 받아내야 할 정도로 중증 치매를 앓는 87세의 노모를 부양하고 있었기 때문. 결국 형사들은 방안에서 간단한 피의자 진술만을 받은 뒤 발길을 돌려야 했다.40여년간 자식이라고는 자신밖에 없는 노모를 모시며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서씨가 남의 카드를 쓰게 된 사연은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40대 중반 즈음에 남편과 사별한 뒤 식당일, 행상 등 온갖 궂은 일을 마다 않으며 노모를 모셔온 서씨는 3년 전 어느날 자신이 폐암에 걸렸다는 날벼락 소식을 들었다. 유일한 혈육이었던 딸이 몇 년전 번듯한 집 한 채를 마련해 줘 노모와 함께 편안히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지만 암 치료비는 눈 깜짝할 새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결국 치료비를 감당 못한 서씨는 고향 친구인 유모(60·여)씨를 찾았다. 서씨의 애절한 사정을 들은 유씨는 선뜻 주택담보대출을 위한 보증을 서줬지만 정작 대출은 불가능했다. 다급해진 서씨는 결국 친구의 신분증을 이용, 죄책감을 무릅쓰고 신용카드 7개를 발급받아 매달 수백만원씩 드는 병원치료비와 생활비를 감당해 나가기 시작했다. 기회가 닿으면 언젠가는 꼭 갚겠다는 다짐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병세는 악화일로를 거듭, 최근에는 폐암말기 판정을 받기에 이르렀고 어느새 카드 빚은 2억여원으로 불어나 있었다.
담당형사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 않느냐"며 "6개월 시한부 폐암환자여서 불구속 수사키로 했다"고 밝혔다. 서씨의 사연을 전해 들은 친구 유씨의 선처호소도 감안됐다. 서울 노원경찰서가 12일 서씨를 사기 등 혐의로 일단 불구속 입건했지만 서씨는 친구에 대한 미안함과 한스러운 자신의 처지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김명수기자 lece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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