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해 중국의 역할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북한의 핵 보유를 원치 않는 중국은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북한 핵 문제를 유엔안보리에 회부할 때 러시아와는 달리 찬성표를 던져 미국의 신뢰를 얻었다. 북한의 핵 보유는 일본의 핵 무장으로 이어져 중국에 엄청난 군사적 부담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에 중국은 북한의 핵 보유를 결코 허용치 않을 것이라는 게 미국의 판단이다.미국은 또 북한이 에너지와 식량 지원, 그리고 군사·정치적으로 중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현실을 주목하고 있다. 북한의 핵 개발 강행 시에 미국이 유력한 대응책의 하나로 검토하고 있는 대북 봉쇄는 중국이 참여하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지만 중국이 미국과 공동보조를 취해주면 사정이 달라진다. 미국은 잘만하면 별 수고와 비용을 들이지 않고 북한 핵 프로그램을 폐기시킬 수도 있다고 기대한다. 이른바 공짜 점심(free lunch)론이다.
그러나 중국이 미국의 희망대로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 지난 달 베이징 3자 회담 이후 중국의 태도가 그렇다. 미국 언론들은 북한 리근 수석대표가 미국의 제임스 켈리 수석대표에게 이미 핵 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폐연료봉 재처리도 거의 끝나 가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지자 "북한이 큰 실수를 했다"고 보도했다. 중국이 곧바로 북한에 강한 압력을 가할 것이라는 기대였다.
하지만 북한의 그 같은 고백에 대해 중국은 전혀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중국은 오히려 "3자 회담이 매우 유익했다"며 3자 회담 후 대화 무용론이 비등한 미국을 압박하고 있다. 베이징 주재 서방 외교관 20명을 불러모아 북한이 3자 회담에서 의미 있는 제안을 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미국이 대북 적대적 자세를 버리면 북한은 핵 프로그램은 물론 탄도미사일 개발 및 수출을 중단하겠다는 뜻을 밝혔다는 것이다. 북한이 핵 프로그램 포기의 전제로 긴 요구 목록을 제시한 뒤 정작 자신들은 매우 사소한 일을 하겠다고 했다는 미국측의 평가와는 전혀 다른 시각이다.
중국은 한술 더 떠 "3자 회담에서 북한이 핵 보유 발언을 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적어도 공식적인 회담 석상에선 그런 얘기가 없었다는 뜻이겠지만 북한의 핵 보유 주장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려는 자세임이 분명하다. 중국이 이처럼 태연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3자 회담 직전 베이징을 방문했던 조명록 북한 인민군총정치국장의 역할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서방세계에 '회의와 우려'를 함께 불러일으키고 있는 자신들의 '핵 진실'을 군부의 1인자인 조명록을 통해 중국에 충분히 설명했을 개연성이 높다.
중국은 최근 들어 국제사회에서 북한에 대한 배려를 집요하게 주장하고 있다.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 제재론에 강한 제동을 걸고 있고 얼마 전 제네바 핵확산금지조약(NPT) 준비회의에서는 북한 핵 문제의 해결 전제로 대북 안보불안이 해소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북한의 체제 붕괴나 대북 군사공격이 자신들의 국익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일 것이다. 이 같은 중국의 입장은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군사적 수단의 사용과 김정일의 제거가 불가피하다고 보는 미국 강경파의 주장과는 확연히 다르다. '베이징을 통해서 평양으로'라는 북한 핵 문제 해결방법론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중국의 역할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 계 성 국제부장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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