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방미 일정은 '동맹과 유대'를 다짐하는 행사로 빼곡히 찼다. 어제 뉴욕증권거래소와 9.11 테러 현장을 둘러본 데 이어, 오늘은 월가의 금융계 인사와 경제인들을 잇달아 만나고 경제전문지와 회견도 했다. 내일 워싱턴으로 가서는 알링턴 국립묘지와 한국전 참전기념비에 참배하고, 참전용사와 역대 주한미군사령관, 미 무역대표 등을 접견한다. 다음날 다시 체니 부통령과 재무· 국방장관 등을 줄줄이 만난 뒤에야 부시 대통령과 대면한다. 회담과 만찬을 합쳐 1시간 30분 동안이다.언뜻 관례를 따른 듯 하면서도 미국쪽과 '코드'를 맞추려 애쓰는 흔적이 유난히 두드러진다. 북한 핵문제 등에서 삐걱거린 한미 동맹과 상호 신뢰 회복을 위한 노력이다. 그러나 코드를 맞추는데 급급한 나머지 소신과 원칙마저 저버렸다는 지적이 이미 나온다. 그토록 당당하던 자주와 자존의 명분은 어디에 두고, 자세를 낮추다 못해 숫제 엎드리느냐는 불만이다.
이런 우려와 불만은 첫 방미가 격이 낮은 '실무방문'으로 낙착된 아쉬움과는 다른 차원이다. 명분을 떠나 실리 측면에서도 얻는 것보다 주고 오는 게 많을 것이 문제다. 전에 없이 많은 경제인을 동반한 것은 노대통령의 이념과 대미 인식 등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하기를 기대한 것이겠지만, 경제인들의 설득 수단은 미국에 경제적 이득을 약속하는 것 밖에 달리 없을 것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북핵 등 안보 문제에서 미국이 일방적 자세를 허물고 우리 입장에 일부나마 공감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 기대 난망이란 분석이고 보면, 노대통령의 방미 성과는 미리 기대치를 낮춘 것보다 초라할 공산이 크다. 전후 세대의 자주의식이 자산인 대통령도 미국에서 인정받는 것에 집착한 역대 대통령을 답습하는 데 그쳤다는 탄식을 낳을 수 있다.
이런 우울한 전망은 미국의 대북한 정책이 정해진 코스를 착실히 밟고 있다는 분석에 바탕한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의 핵개발 계획뿐 아니라, 미사일 개발과 수출, 재래식 군비까지 쟁점으로 압박하는 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여기에 동맹국 한국의 독자적 이해는 심각한 고려 사항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부시 대통령이 2001년 3월 김대중 대통령과의 첫 정상회담에서 햇볕정책은 외면한 채 대북한 강경발언을 거듭, 'DJ의 뺨을 때렸다'거나 '빗속에 세워두는 홀대를 했다'는 평가를 낳은 사건으로 여실히 입증됐다.
부시는 이어 지난해 11월 북한이 핵개발 계획을 시인한 뒤 김대통령이 멕시코 APEC 정상회담과 귀국 길 시애틀에서 햇볕정책 지속을 다짐한 것을 아예 무시했다. 임박한 대선에서 보수적인 이회창 후보가 집권할 것으로 예상했다는 분석이 뒤따랐다. 미국은 이와 함께 지난해 9월 고이즈미 일본총리가 이정표적인 평양 방문에서 식민통치를 사과하고 관계 정상화 일환으로 대규모 경제 지원을 약속하자, APEC 회담에서 핵계획 폐기 조건을 붙일 것을 강요해 결국 북·일 대화를 무산시켰다.
부시 대통령은 이 달 한·일 정상과의 연쇄회담 뒤 제한적인 북미 대화 를 승인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미국의 주목적은 북한과 합리적 조건으로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주지시키는 데 있다는 지적이다. 노대통령의 한껏 자세를 낮춘 방미에 몇 가지 외교적 수사(修辭)는 들려주겠지만, 미국의 강경한 대북 압박은 지속될 것으로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주한미군의 낡은 인계철선(Tripwire) 역할에 집착, 미국이 한국 길들이기를 위해 운을 떼는 것으로 의심되는 주한미군 재배치를 연기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은 우습다. 한미 동맹의 심각한 갈등을 동반한 북한 문제를 북핵에만 집착해 볼 게 아니라, 북한체제 붕괴와 한반도 전후 질서 종식의 전조(前兆)로 봐야 한다는 지적에 귀 기울여야 한다. 미국의 움직임에 일희일비할 게 아니라, 역사적 변화에 주체적으로 대비하라는 충고다.
강 병 태 편집국 부국장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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