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TV에 나온 가수 겸 DJ 배철수를 보고 초등학생 딸이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저 아저씨 누구야? 배칠수 아저씨를 똑같이 흉내 내네."'단군 이래 최고'라는 성대모사와 신랄한 정치 풍자로 TV 라디오 인터넷 등 각종 매체를 종횡무진으로 누비는 배칠수(32·본명 이형민). 출세작인 배철수 흉내와 부시에게 항의 전화를 거는 김대중 전 대통령 모사에서 MBC '코미디 하우스' 3자 토론의 노무현 대통령 성대모사에 이르기까지 그의 '입'을 거쳐간 유명인은 줄잡아 50여 명. 그래서 방송가에는 "제작비 아끼려면 배칠수를 잡아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돈다.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진 날 저녁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진 인터뷰 내내 그는 차분하지만 강단 있는 어조로 지나온 삶과 철학을 조곤조곤 풀어냈다. 그의 말솜씨에서 팍팍한 세상살이에 찌든 서민들의 가슴을 속 시원하게 씻어주는 재담꾼의 저력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물려준 끼, 그리고 가난
배칠수, 아니 나 이형민은 2남5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첫 걸음도 떼기 전 어머니를 여읜 탓일까, 어린 시절 나는 한마디로 애늙은이였다. 좋게 말하면 일찍 철이 들었고.
나이 오십에 막둥이를 얻은 아버지는 밥상머리 교육에는 엄격했지만, 참 재미난 분이셨다. 이웃 집 마당에 슬쩍 들어가서는 집 나가 몇 달째 소식이 없는 그 집 아저씨 목소리를 흉내 내 "00야, 애비 왔다"고 부르고는 부리나케 도망치는 장난을 치곤 하셨다. 부전자전이다. 그 끼를 물려받아 성대모사로 밥 먹고 살고, 군 시절 만난 아내(여섯 살 아래인 이은미씨는 전국체전 2관왕에 오른 수영 국가대표 선수 출신)도 "하도 웃겨서 발목 잡혔다"고 말하니. 하지만 어릴 적엔 노름에 빚 보증까지 잘못 서서 그 많던 고향 전답을 다 날린 아버지를 보며 "절대 당신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고3때 아버지를 잃고 가진 거라곤 뭐 두 쪽밖에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되면서 "악착같이 돈 벌어 부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보디빌더에서 '방송인' 배칠수로
타고난 체격(키 184㎝에 몸무게는 한때 100㎏까지 나갔다)에 중1때부터 익힌 보디빌딩 실력을 살려 재능대 사회체육학과에 들어갔다. 우유배달로 겨우 마친 대학 시절, 그리고 졸업 후 유아 체육 교사로 뛰면서도 내 관심은 오로지 돈이었다. 돈만 많이 준다면 전국 어디든 갔다. 오가는 버스에서 잠 자고 싸구려 김밥으로 끼니 때웠다. 그렇게 모은 5,000만원에 자형이 빌려준 돈을 보태 1997년 인천에 헬스클럽을 열었다. 보디빌더로도 꽤 이름을 날렸다.
99년 초쯤 아내가 불쑥 성대모사 경연대회 참가증을 내밀었다. 재미 삼아 나갔는데 대상을 탔다. 여기저기 방송에 불려 다니다가 아예 본업을 바꿨다. 새 삶을 열어준 아내가 고맙다. 헌데 요즘 너무 바빠서(고정 출연 프로만 7개, 거기다 광고 등 더빙까지) 독수공방 좀 시켰더니 "지금 같으면 배칠수랑 절대 결혼 안 해. 원빈이라면 몰라도" 라며 배신을 때리더라. (이렇게 말해놓고는 지갑 속 사진을 보여주며 "아내도 예쁘지만 엄마 얼굴에 아빠 몸매 닮은 우리 솔이 정말 멋지지 않느냐"며 연신 자랑이다. 갓 돌 지난 딸 솔이와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단다.)
인기비결? 흉내가 아니라 풍자다!
99년 말 시작한 인터넷방송 렛츠뮤직 '배칠수의 음악텐트'에서 '엽기DJ' 시리즈로 시쳇말로 '떴다'. 인터넷문화 태동기라 운도 좋았지만, 육두문자 날리며 시원하게 긁어대는 세태 풍자가 먹힌 것이다. 지난해 3월 인구에 회자된 전투기구매 스캔들 풍자(일부만 옮겨보면 이렇다. "어이, 조지 부시. 자네가 팔것다고 한 그 F15인가 하는 자전거 있자녀. 그거이 나중에 부품 땜시 골치가 쪼까 아프지 않겄나 해서 시방 전화하는 건디…뭣이여? 공장 폐쇄할지도 모른다고? 이런 잡것이, 야 이 XX 놈아…")는 다운로드 건수가 1,000만에 달했다. 흉내내기만 잘했다면 이만큼 컸겠나.
배칠수식 풍자, 그리고 철학
풍자? 서민들이 가려워하는 부분을 딱 짚어 긁어주는 거다. 사실 정치는 잘 모른다. 많이 알 필요도 없다.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다 알려진 얘기에서 한 발짝만 더 나가 살짝 비틀어주면 된다. 듣는 사람이 실컷 웃다 "아!" 하고 무릎을 칠 수 있을 정도로.
풍자 대상에 한계를 두지 않지만 매체에 따라 수위 조절은 한다. 예를 들면 유시민 의원의 캐주얼차림 등원 논란 때 공중파 라디오에서는 "복장 갖추고 멱살잡이하는 게 국회의원 품위냐" 정도였다면, 인터넷에선 "X까고 있네, 씨X. 왜 옷 갖고 지랄들이야"라고 시원하게 깠다. 물론 인터넷이라고 늘 육두문자를 쓰는 건 아니다. 친척 어른 중에 3선 의원이 있는데 자주 뵙고 대화한다. 그 분에게 들은 국회의원의 입장과 나름의 고충을 그대로 전하기도 했다.
TV는 별로, 그러나 영화는 OK
'3자토론'을 하고 있지만 TV 출연은 되도록 피한다. 분장 등 절차가 복잡해 귀찮고, 코드도 잘 맞지 않는다. 반면, 라디오는 운전자나 공장 직원, 자영업자, 주부 등 서민들이 즐겨 듣는 매체라 좋다. 다른 일을 욕심 낸다면 영화 한 번 해보고 싶다. 허풍쟁이에 껄렁한 깡패 같은 역할이면 딱 좋겠다.
끝으로 그가 지지한 노무현 정부의 좌충우돌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바로 시원한 답변이 나왔다. "난 노무현 추종자가 아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차악'(次惡)이라는 생각에 찍었다. 지지기반이 약한 건 다 아는 사실인데 이 정도 부작용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바보다. 이제 겨우 두 달 남짓이다. 욕할 건 욕하더라도 흔들지는 말자. 세계 정세나 경제를 보더라도 지금은 다 함께 노를 저어가야 할 때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 "성대모사도 방뻡이 있습니다"
정치인이든 연예인이든 감쪽같이 흉내 내는 배칠수의 성대모사는 놀라움과웃음을 넘어 소름이 끼칠 정도다. 비법은 뭘까. “타고난 끼도 있지만, 치밀한 분석과 꾸준한 연습”이다.
“목소리는 흉내 내봐야 100% 똑같을 수 없고, 화법의 특징과 호흡의 길이 등을 정확히 분석해 한 달쯤 아예 그 목소리로 살아본다.” 성대모사리스트에 오른 50여명 가운데 “안보면 속을 정도로 흉내낼 수 있는” 사람은 10여명. 그 중 몇 사람의 흉내 포인트를 들어봤다.
노무현은 경상도 사투리는 맞는데 표준말을 쓰려고 애써서 좀 어렵다. 목소리보다는 ‘방뻡(방법)’ ‘다만’ ‘가급적’ ‘모양새가’ 등 즐겨 쓰는 어휘를 적절하게 섞어준다.
DJ(김대중)는 즉흥연설에 강해 ‘말하자면’ ‘에~’ ‘다시 말해’ 같은연결어로 시간을 번 뒤 얼른 다음 말 생각하는 게 특징. 눈을 자주 껌벅여주면 분위기 확 산다. YS(김영삼)는 높은 목소리에 혀 짧은 듯한 발음, 앞뒤 안 맞는 말 등이 포인트. JP(김종필)는 굵직한 목소리로 그냥 긁어주면된다.
최양락은 좀 얍삽한 목소리로 빨랐다 느려졌다 호흡 조절만 해주면 OK. 차인표는 목소리는 맑은데 구강 구조가 특이한지 말이 약간 샌다. 야구선수이승엽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가는 목소리로 ‘그리고’ ‘그런데’ ‘그래서’ 따위 접속사로 말을 끝없이 이어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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