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중순 휠라 코리아가 미국계 투자 펀드인 서버러스, 휠라 아메리카와 공동으로 휠라 그룹 본사를 인수한다는 소식이 국내에 전해졌다. 언론은 "새우가 고래를 잡아 먹었다"며 야단법석을 떨었다.휠라가 어떤 회사인가. 1926년 설립돼 이탈리아 비엘라에 본사를 둔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로 전 세계 50여개국에 매장만 9,000여개다. 나이키, 리복, 아디다스에 이어 4위 스포츠 브랜드인 만큼 고래라는 표현도 틀린 말은 아니다.
정작 언론 보도를 보는 순간 나는 "내가 그렇게 큰 일을 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랑스럽기 보다는 당혹감을 먼저 느꼈다. 물론 본사 인수문제가 시작된 것은 이미 1년 전이고, 그 사이 나는 무려 29번이나 해외출장을 다니며 이 문제에 매달렸다. 뉴욕으로, 이탈리아로, 다시 서울로. 내 남은 인생을 걸고 죽기살기로 뛰어 다녔다.
3월7일 본사 인수계약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 뉴욕 40번가 브라이언트 파크호텔에서 바라본 뉴욕 밤 거리는 여느 때처럼 화려했다. 그 밤 불빛을 바라보며 문득 휠라와의 첫 인연이 떠올랐다. 당시 화승에서 수출이사로 일하던 나는 옷만 만들던 휠라 브랜드로 신발을 만들어볼 생각을 했다. 하지만 라이선스는 이미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간 뒤였다. 휠라는 나에게 마치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다.
그로부터 딱 20년이 흐른 후 어느덧 나는 그 산의 정상에 올랐다. 하지만 뿌듯함보다는 오히려 엄청난 부담감이 온 몸을 휘감았다. 또 얼마나 많은 일이 몰려들 것인가.
나는 심란해지려는 마음을 돌리기 위해 서울로 전화를 돌렸다. 통화 상대는 깜치라는 별명을 가진 나의 고교 친구 이완섭이었다. 내가 "메이 아이 스피크 투 깜치 리"라고 능청을 부리자 깜짝 놀란 친구는 영문도 모른 채 "디스 이스 깜치 리"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내가 "윤수다. 이 놈아"라고 하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나는 휠라와의 계약이 성사됐음을 알렸고 친구는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 순간 왜 평생 동안 고락을 함께 해온 집 사람보다 친구를 먼저 찾았을까.
뭐라 딱 집어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그 친구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완섭이는 수원중을 졸업하고 서울고를 다니기 위해 상경한 촌놈이었던 내가 처음으로 만난 서울 친구다.
휠라 본사를 인수하기까지 뜻하지 않은 도움을 준 사람도 있었고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지금 이 자리서 모든 것을 밝힐 수는 없다. 조만간 모든 법적 절차가 마무리되면 속 시원하게 털어놓을 것을 약속한다.
아마 '윤윤수'라는 이름 석자가 세인의 기억에 뚜렷이 남은 것은 1996년 내가 연봉 18억800만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신문에 나간 때가 아닌가 한다. 이때부터 언론은 나를 성공적인 샐러리맨의 상징처럼 다뤘고, 사람을 만날 때면 "올해는 얼마나 받느냐", "돈 버는 비결이 뭐냐" 는 질문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나는 그 동안 한번도 돈을 벌기 위해 일한 적이 없다. 아마도 내가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일을 했다면 결코 지금과 같은 성공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일 자체를 즐겼고, 내게 주어진 일을 우직스럽게 했을 뿐이다.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적당히 일한 적이 없다. 요행을 바란 적도 없다. 남을 짓밟거나 이용한 적도 없다. 오로지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일했다. 나의 지난 인생 이야기는 근사한 성공담이 아니다. 계속되는 역경과 좌절 속에 넘어지면서도 끝까지 다시 일어나려고 노력했던 오뚝이 같은 사람의 인생역정이 더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다.
세상은 영웅에 의해 변화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잇속이 밝은 사람이 앞서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세상은 우직하게 보일지라도 끊임 없이 도전하는 사람에 의해 발전한다. 또 언젠가 그들은 빛을 보기 마련이다.
이제 내 나이 쉰 여덟. 하지만 마음은 아직도 청년이다. 30년 전 첫 직장이었던 해운공사(한진해운 전신) 신입사원 윤윤수나 지금이나 마음만은 다를 게 없다. 나에겐 여전히 넘어야 할 산들이 많다. 나는 차례로 그 산에 오를 것이다.
먼저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은 휠라와 처음 만나는 순간으로 잠시 돌아가는 것이 순서일 듯 싶다. 당시로서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지만, 바로 그 순간이 내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운명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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