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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에선]경남 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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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에선]경남 하동

입력
2003.05.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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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곱씹어도 경남 하동은 복 받은 땅이다. 산이면 산(지리산) 강이면 강(섬진강), 거기다 한려수도까지 한 품에 싸 안았다. 하동포구 팔십리를 끼고 남해대교를 넘는 국도 19호선 꽃길도 전국 어디에 던져 놔도 기죽지 않을 도로로 꼽힌다. 화계 차(茶)가 있고, 쌍계사 벚꽃길이 있고, 소문이 덜 나 그렇지 근동에서는 전남 광양(다압마을) 윗자리를 내준다는 매화마을도 있다. 거기에 주민들이 '히든 카드'로 제껴내며 빙그레 웃는 게 재첩이다. 글로 명(名)이 난 김훈이 하동포구 대표 국물로 재첩국을 대면서 '순결한 원형의 국물, 모든 맛의 밑바닥 맛(자전거여행)'이라는 추상으로 슬쩍 비껴섰던 그 재첩이다.7일 오후 하동읍 목도리 앞 강가. 비닐 몸빼바지를 껴 입은 할머니들이 호미질에 허리 펼 새가 없다. 재첩잡이다. 젊은 축에 드는 50,60대 서넛은 허리춤까지 오는 물속에 섰다. 10㎏씩 나가는 '거랭이(갈쿠리를 개조한 어구)'를 끌고 당기며 씨름 중. 재첩잡이는 물때를 맞춰야 한다. 도회지 자식들이 '이 짓' 그만두라고 성화라며 끝내 이름을 감춘 할머니(81)는 "한 물때(간조기 3∼4시간)에 한 되(3㎏)나 잡나 몰라. 요새는 재첩도 없고 심(힘)만 든다"고 했다. 그래도 한 되라면 못해도 7,000∼8,000원, 적은 돈은 아니다. 재첩은 마을 어업계에서 전량 사들인다.

하동군 13개 읍면, 319개 마을 가운데 섬진강과 지천을 끼고 재첩을 잡는 마을은, 갯물이 섞여드는 고전면 신월마을에서 하동읍 흥룡리까지 약 22개 마을이다. 주민들은 1.5㎝ 내외의 거뭇한 '까막조개(갱조개·재첩의 동넷말)'로 아들 딸 키우고 공부시켰다고 했다.

목도리는 하류라 재첩이 예전 같지 않은 동네다. 모래채취로 갯물 함량이 많아져 종패(種貝)도 맺지 못한다. 강 모래펄이 부실하고 수심도 깊어 각자 거둔 만큼 갖는 수작업(호미·거랭이)은 별로 없고, 대부분 배로 강 바닥을 훑는 배 채취가 주류다. 배 작업 수익금은 어업계 공동재산으로 적립, 연말이면 가구수대로 나눈다. 그래도 그게 연 7억∼8억원이다. 목도 어업계는 지난 연말에 불우이웃돕기 성금도 걸게 냈다고 군 관계자는 귀띔했다.

반면에 섬진강철교 아래 신비·광평 어업계는 강 마을 중에서도 부자마을에 든다. 재첩이 가장 많은 곳인 데다 모래톱이 좋아 7,8월 한창 때는 한 사람이 한나절 거랭이질로 일고여덟 말(약 50만원)도 거뜬하다고 했다. 그 철에는 500∼600명의 주민들이 모두 강으로 나오는 바람에 마을이 텅텅 빈다.

재첩 가격이 좋아진 것은 불과 5,6년 전부터다. 하구 둑 공사로 영산강 재첩은 씨가 말랐고, 낙동강도 생산량이 격감했기 때문이다. 강원 송지호와 남대천에서 일부 나지만 양이 적다. 반면에 무공해에다 간과 담(膽)에 좋고 원기회복에 그만이라고 알려지면서 수요가 폭증, 요즘은 한 말(30㎏)에 못해도 6,7만원, 좋을 땐 15만∼20만원도 간다. 그것도 없어서 못 파는 상황이라 굳이 돈 들이고 동네 더럽혀가며 축제도 안 연다고 했다.

하지만 돈 되는 일이다 보니 잡음이 없을 리 없다. 마을마다 할당된 '업무구역(재첩채취 허용수역)'을 넘어서는 일이 잦고, 그래서 멱살잡이에 고소·고발 사태도 적지 않다. 강한중(46)씨는 "조개만 나모 섬진강이 싸움 구디이(구덩이)가 된다"고 했다. 주민들의 뜻도 쉬 모일 턱이 없다. 고깃배로 강을 오르내리며 대대로 재첩을 잡던 어부들은 4년 여 전 어업계가 만들어지고 배 작업이 마을 공동작업에 제한되면서 소득에 타격을 입게 됐고, 80년대 중·후반 개인 양식면허를 얻어 강 유역 일부를 사유화한 일부 주민은 원성을 사고 있다. 지금은 섬진강 휴식년제(1999∼2003)로 하류 모래채취가 중단되면서 상황이 나아지긴 했지만, 상류에 댐에다 취수장이 서면서 재첩량도 줄었다.

주민들과 수협 단체 군청이 모여 지난 달 말 '하동 재첩자원 보존관리 협의회'를 출범시킨 것도 그런 정황들 때문이다. 부언하자면 마지막 재첩의 보루인 섬진강을 지키자는 것이 첫째요, 주민간 불화를 두고 볼 수 없다는 것이 둘째요, 씨알 굵은 재첩을 많이 잡을 수 있는 방도를 찾자는 것이 세 번째 목적이다.

협의회는 29명의 위원을 두었다. 지역 읍·면장과 어업계 대표, 중매인, 수협·수산단체, 중매인까지 망라, 조업 원칙서부터 어로시기에 이르는 모든 것을 협의하고 의결하는 기구다. 각종 이해대립은 물론이고 관과 협조할 사안도 챙길 계획이다. 강 환경정비, 종패보호 및 증산방안 모색도 협의회 책임이다. 한 관계자는 "의결사항이 법적인 강제력은 없어도 주민들이 한 마음으로 맨든 기고, 군수님도 적극적으로 챙기시니까 법보다 심이 있을 낍니다"고 했다.

신비·광평 어업계가 올해 작업을 이 달 10일부터 시작하기로 합의한 것도 협의회의 획기적 성과 가운데 하나. 신기마을 한 주민은 "한 사람이 나가모 니도 나도 나가고, 그라모 씨알도 굵기 전에 모두 긁어 제끼니 심은 심대로 들고 돈은 적었다 아이가. 제 살 깎아묵는 택이지"라고 말했다.

협의회는 강 바닥을 고르게 정비해 재첩의 서식환경을 개선하자는 안도 내놨다. 물 밖 모래톱을 퍼내 깊은 곳을 메워 서식공간을 넓히고 작업하기도 편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비싸다고 중국산 수입 재첩(하동재첩 값의 20%)을 쓰는 식당을 '왕따'시키자는 취지로 '하동 재첩' 스티커를 제작 배포할 계획도 세웠고, 어린 재첩을 보호하기 위해 거랭이 발 간격을 넓히자는 제안도 나왔다.

군의 협조로 남해고속도로 하동IC 입구인 고전면 전도리부터 하동송림까지 10㎞구간을 '재첩도로(가칭)'로 명명하고, 상징물도 세우기로 했다. 재첩들이 겨울에는 모래 깊숙히 숨는 바람에 채취가 힘든 만큼 모래가 적고 뻘이 많은 횡천천 주교천 등 지천에 종패를 뿌려 겨울 작업도 가능하게 할 생각이다.

"인자(이제) 교통정리가 안 되겄나. 재첩이 보밴데 맘을 재첩에 맞차감서(맞춰 가면서) 니캉 내캉 함께 살아야지, 안 그렇나!" 하동은 주민들 스스로 또 하나의 복덩이를 빚어낸 듯했다.

/하동=글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사진 이성덕기자

● 하동군청 김종보 계장

재첩 협의회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여러 해 전부터 제기돼왔지만 당장 먹고 살만 하니까 그게 잘 안되던 터였다. 2년 여 전에 주민들이 협의회란 것을 만들었지만 해를 못 넘기고 깨진 것도 따지자면 그 때문이다.

주민들은 지난 달 28일 협의회가 재출범한 것은 하동군청 어업생산과 김종보(52·사진) 계장의 공이라는 데 토를 달지 않았다. "거그서(김 계장이) 차고 해준께 이만치라도 되는기지, 우리끼리 해무라꼬 가기 놓으모 백날 천날 그 밥에 그 나물일 끼라."

김 계장의 재첩 인연은 10년째다. 고향 거제에서 어업지도원 생활을 하다 공무원시험에 합격, 9급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게 1975년. 그는 93년 7월 하동군청으로 전근 와 재첩 업무를 떠안은 이래 한 시도 그 일을 벗어놓은 적이 없다. "재첩이 뭔지도 모르고 업무를 맡았을 때는 사흘 걸러 한 번씩 주민 40∼50명이 몰려와 데모를 해 쌓는데 정신이 없습디다." 멱살잡이에 욕설에, 시련도 많았고 음해도 많았지만 순리를 따지며 부대끼다 보니 재첩도 알만큼 알게 됐다. 이제는 주민들 얼굴만 쳐다봐도 마음을 읽게 됐다고 했다. 협의회 간사를 맡은 그는 조직이 자리를 잡는 대로 손을 털고 완전히 주민들에게 넘길 참이라고 했다. 그런 뒤 재첩 관련 자료와 문헌들을 모아 정리하고, 섬진강 어민들의 재첩잡이 생활을 소개하는 책을 내겠다는 게 그의 반평생 지방공무원 생활의 남은 꿈이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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