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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철학자 엄정식교수의 시골생활 당진 "은곡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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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철학자 엄정식교수의 시골생활 당진 "은곡재"에서

입력
2003.05.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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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에 인접한 충남 당진군 당진읍 원당리의 은곡마을. 야트막한 산들이 종이학처럼 곱게 접혀있는 작은 마을이다. 그 한쪽 갈피 언덕배기에 낡은 농가 한 채가 숨 듯 올라 앉았다. 오르는 길은 고작 두어 명이 어깨를 맞댈 수 있을 만큼 좁다. 집 안팎의 잡초들은 온통 발목을 휘감고 툇마루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였다. 오월의 햇살이 적요한 금요일 오후. 오솔길 잡목 터널을 헤쳐 올라온 승합차 한대가 뒤뚱거리며 뜰에 들어섰다. 검은 뿔테 안경만 아니라면 영락없는 농부 행색인 운전자가 내렸다. "아이구, 벌써 왔어요? 오는데 고생 안 했어요?" 손님을 반기는 표정과 탄성이 어린아이처럼 도무지 티가 없다. 은곡재(隱谷齋)라고 이름 붙여진 이 집의 주인 엄정식(嚴廷植·61·철학과) 서강대 대학원장이다.흙 묻은 고무장화에 바짓가랑이를 접어넣은 엄 교수는 집 안팎의 먼지를 아무렇지 않게 손으로 쓸어내고 차에서 짐을 부렸다. 책 몇 질은 마당 한 켠에 쌓아놓고 아내가 플라스틱 찬합에 챙겨준 며칠치 먹거리는 부엌에 들여놓았다. 나머지는 대개 골판지 따위의 잡동사니들이다. "다 서울 목동아파트 집에서 남들이 내다버린 걸 주은 거에요. 여기 있는 물건 대부분이 그런 것들이에요."

아닌 게 아니라 집에는 그만큼이나 오래 된 물건들이 꽉 차 있다. 여기저기 많이도 걸린 시계들은 하나같이 먼지와 거미줄을 뒤집어쓴 채 제멋대로인 시각으로 멈춰있고 흙벽에는 난데없는 이발소 거울도 붙었다. 예전 교무실에서나 쓰던 일정표 칠판이 매달렸는가 하면 틀어도 소용없을 것 같은 고물 TV에, 30년도 더 지난 듯한 일제 파나소닉 라디오에, 줄 끊기고 칠 벗겨진 기타에, 이 빠진 소반에…. 가까운 철학교수들이 와서 보고는 "쓰레기를 갖고 별장을 만들었다"고 기막혀 했을 정도다. 하도 주워 담으니까 이젠 아파트 경비원들이 이사철이면 "교수님, 물건 나왔습니다"라고 먼저 연락을 한단다. 그가 여기서 글 쓸 때 쓰는 책장이나 의자 등도 그런 것들이다.

"도대체 이런 잡동사니들을 왜 소유하려 듭니까" 생각없이 던진 질문에 철학자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소유란 게 뭡니까. 그냥 아까워 못 버리고 갖고 있다면 그게 소유입니까? 중요한 건 자연적인 것이지요. 종교에서 말하는 무소유(無所有)는 오히려 작위적이에요."

학교일이 너무 바빠 이번에는 3주만에야 내려왔다는 엄 교수는 집 안팎을 손보고 안내하며 한껏 들떴다. 마치 오래 헤어진 연인을 만난 표정이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늦은 점심을 챙겨먹으면서도 눈에 들어오는 풍경에 연신 감탄사를 멈추지 못한다. "이 투명한 신록을 보세요. 아, 저 역광을 받고 선 나무 좀 봐요. 너무 재밌죠." ('재미있다'는 엄 교수 특유의 '멋있다' '좋다'는 표현이다) 건너 편 산자락의 김씨 할아버지가 오랜만의 인적을 반겨 찾아와서는 점심 상의 막걸리를 한잔 얻어 마시고 휘적휘적 내려갔다.

그가 이 오래 된 농가와 인연을 맺은 지는 벌써 열여섯 해나 됐다. 5공 정권 말기인 87년 초여름. 학생처장을 맡아 감옥에 갇힌 제자와 그 가족들을 만나러 전국을 한바퀴 돌 때였다. 마지막 일정까지 마치고 지친 몸으로 대전에 도착했을 때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 너무 어릴 때 여의어 기억마저 희미한 아버지. 5대 독자로서 무려 일곱 딸을 낳은 끝에 중년을 넘겨서야 기어코 6대 독자인 그를 얻고는 돌아가신 아버지였다. 그는 무작정 아버지의 고향 당진행 시외버스에 몸을 싣고는 읍내 복덕방을 찾았다. "조용히 글쓰고 생각할 만한 곳이 어디 없겠습니까." 그 복덕방에서 찾아준 곳이 이 집이었다.

산 자락 깊숙히 서너집 밖에 없어 그냥 '숨은 골'로 불리던 적막한 마을. 150년은 족히 넘었다는 '?'자형 토담집은 말 그대로 폐가였다. 무너진 흙벽을 메꾸고 지붕이 기운 툇마루에는 나무기둥을 찔러 넣었다. 곧 쓰러질 외벽 한편은 자키로 버텨 세우고 부엌 아궁이도 불길이 잘 들게 손보았으며 뒤뜰에 축대도 쌓았다. 온갖 수목이 넉넉하게 감싸안은 널찍한 뜰에는 작은 연못도 팠다. 마을 이름을 딴 은곡(隱谷)이라는 아호(雅號)도 얻고 절친한 이명현(李明賢·전 교육부장관) 교수는 집에 은곡재(隱谷齋)라는 그럴듯한 이름도 붙여 주었다. 그렇다 해도 오래 비운 뒤 끝의 집 모습은 지금도 여전히 폐가에 가깝다.

엄 교수는 한달에 두어 번씩 틈나는 대로 이 곳에 혼자 내려와 며칠씩 머문다. 온전히 '서울 촌놈'이지만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어설프게나마 농사도 짓는다. '교수님'답지 않은 소탈함에 일찌감치 마음을 연 이웃은 벌써 그의 계단 논을 갈고 물도 채워 두었다.

그의 은곡재 생활은 도시인들이 흔히 꿈꾸는 전원생활과는 거리가 멀다. 농부와 똑 같은 차림새로 농사일을 해도 그는 어쩔 수 없는 철학자다. 이 곳에서 보고 느끼고 직접 몸 담그는 일들 모두가 철학적 화두(話頭)가 된다.

농사일에 땀을 흘리면서 '노동이야말로 인간적 존재양식 그 자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체감하고, 천방지축 뛰어다니며 이웃에 피해를 주다 끝내 줄에 묶인 강아지를 보며 '충동과 자율의 양립'을 궁리한다. 선명한 계절의 흐름을 보면서는 과연 변화란 무엇인가를 고민한다. '그것은 존재의 본질인가, 아니면 주관적 착각의 소산인가. 또 어떤 법칙의 지배를 받는 필연적 소산인가, 아니면 무질서한 혼돈의 회오리인가.'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타들어가는 장작을 보는 일도 공부다. 불을 잘 타게하는 조건인 아궁이와 장작의 습기는 자연의 선험적(先驗的) 조건을, 크기와 재질에 따른 적절한 장작의 배치는 자아(自我) 실현에 필수적인 관계성을 생각케 한다. 완전히 타버린 한줌 재에서는 진정한 자기초월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배운다.

마당에 엉킨 잡초를 베며, 혹은 집안에까지 스며들어온 뱀을 쫓으며 기능과 유용성에 국한된 편협한 인식을 반성하고 심미적 가치의 중요성 등을 새삼 환기하기도 한다. 처마마다 엉킨 거미줄과 주위를 날아다니는 벌떼, 행여 밟을까 피해다니는 개미들에게서도 생명, 혹은 환경철학의 단초를 발견하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성(理性)이 승(乘)한 철학자(그는 서강대와 미국 메인대, 미주리대에서 비트겐슈타인 등을 연구한 분석철학자다)라 해도 낡고 외딴 집에 혼자있다 보니 칠흑의 밤이면 왠지모를 공포에 머리 끝이 쭈뼛 설 때도 종종 있단다. 그럴 때면 대학 때부터 벗해온 죽도를 휘두르며 귀신을 쫓는답시고 산중턱까지 치닫기도 한다. "그건 전혀 분석철학자 답지 않다"는 말에 그는 껄껄 웃었다. "(만사 양극단이 그러하듯) 철저한 분석은 신비와도 통하는 법이지요."

이날?모처럼 대학원 철학과 석사과정의 제자 다섯이 은곡재를 찾아왔다. 저녁상을 물린 뒤 다들 비좁은 부엌 아궁이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엄 교수가 독에서 손수 담근 걸쭉한 막걸리를 퍼내 돌렸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한참 정담이 오가다 결국은 철학적 담론으로 이어졌다.

"선생님, 인간이란 게 무엇입니까. 왜 살아야 합니까. 철학이 이런 근원적 질문에 답을 줄 수 있습니까?." "인간의 문제에 대해 철학이 영화나 시 만큼의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철학이 이 시대에서 과연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습니까. 결국은 좁은 자기만족에 머무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 …

제자들의 잇단 질문에 스승은 예의 어린아이 같은 미소로 응답했다. "왜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왜 존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인가를 생각해. 산다는 것은 What이 아니라 How의 문제 아닐까?"

스승과 제자들의 얘기는 끝이 없었다. 장작불빛과 술기운으로 그들의 얼굴은 모두 발갛게 익었다. 깊은 밤 집 밖에서는 논물 속의 개구리 울음만이 요란했다.

/편집위원 junlee@hk.co.kr

엄 교수는 은곡재에서 지내는 이유를 글 이곳 저곳에 썼다. "나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주제는 여전히 자아(自我)의 인식이다. 여기에 오면 비로소 내 자신으로 돌아와 있음을 실감한다. 이곳은 내 영혼의 안식처이자 진정한 자아의 거주지다. … 감당할 수 없을만큼 즐겁고 황홀하다."

하기야 깊이와 폭은 다를 지라도 자신을 찾는다는 것이 어디 철학자의 문제일 뿐이랴. 고되고 힘든 삶에 떠밀려 우리들 모두는 '나는 누구인가'를 잊은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아아, 언제였던가. 일상과 관계없는, 그러나 더없이 중요한 이런 문제로 가슴을 앓고 밤새워 토론하던 적이. 은곡재는 그런 곳이었다. 우리가 절실히 갖고싶은 '마음 속 나만의 작은 방'과도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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