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아침을 열며]默言의 새만금에 답하라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아침을 열며]默言의 새만금에 답하라

입력
2003.05.10 00:00
0 0

"낙화는 정이 있어 흐르는 물을 따라 가고, 흐르는 물은 정이 없어 낙화를 흘려보낸다."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대선사 진제 스님이 던지셨다는 화두다. 유정과 무정의 경계를 단숨에 허물어버리는 그 화두의 힘은 너무나 강렬해서 문득문득 나를 찌른다.

대선사는 유정과 무정의 경계 없음을 보여줬건만 여전히 유정한 나는 부처님이 오셨다는 그 날, 그 동안 일방적으로 정이 든 사람들을 찾았다. 새만금에서 서울까지 305㎞를, 세 걸음에 한번씩 엎드려 절하는 사람들, 그들은 문규현 신부고, 수경 스님이며, 이희운 목사고, 김경일 교무였다.

세계 5대 갯벌 중에 하나, 여의도 면적의 140배나 되는 새만금 갯벌을 살려달라고, 전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할 끔찍한 생명파괴 사업을 중단하라고 그들은 목숨을 건 기도의 행진을 하고 있다. 3월28일 새만금 바닷가를 떠나 김제∼군산∼보령∼예산∼아산∼천안을 거쳐 평택까지 온 것이다.

벌써 평택이었구나, 스스로 유정하다고 생각한 나는 얼마나 무정한가. "벌써" 평택이라니! 새만금 바닷가를 떠난 지 42일인데. 그 42일 동안 낮에는 기어가고 밤에는 천막을 치고 거리에 누웠는데.

그들은 이제 묵언 중이다. 묵언 중인데 답답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강렬하다. 진제 스님의 화두의 강렬함이 화사하다면 온 몸, 온 태도가 화두인 이들의 강렬함은 엄숙하고 비장하다. 목숨을 건 참회의 기도 수행 중에 입까지 닫아버리다니, 묵언의 의미는 뭘까….

말하지 않겠다는 건 듣지도 않겠다는 거였다. 정이 듬뿍 들어 이제는 그들 자신이 되어버린 새만금의 운명을 놓고, 여전히 방조제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느니, 미군측에서 150만평을 요구했다느니 하는 소문을 듣지 않겠다는 거였다. 그런 어지러운 소문을 들어 슬픔을 갖고 분노를 품어 기도하는 마음을 더럽히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거였다. 새만금 개발을 강행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의 마음도 내려놓고, 새만금에 대한 연민도 내려놓고,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는 자만심도 내려놓고, 지금껏 살아온 삶을 참회하겠다는 거였다.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만 괜찮으면 괜찮은 것이라는 식으로 이기적으로 살아온 것은 아닌지. 지금 당장 돈이 되고 편하기만 하면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아귀처럼 마구잡이식 개발로 어머니 자연을 난도질하지는 않았는지. 그들의 걸음걸음에 우리가 아픈 것은 거기에 우리가 지은 죄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생명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산이 죽으니 강이 죽고, 강이 죽으니 바다가 죽는다. 개펄이 죽으니 바다생명이 죽고, 바다 생명이 죽으니 바다가 죽는다. 자연을 죽이고 건설한 인간의 도시는 거대한 먼지군단에 짓눌려 있고, 미세한 먼지군단에 짓눌려 있는 인간의 폐는 늘 감기 걸릴 준비를 하고 있다. 숲은 우리 몸 밖의 폐라는 사실을, 숲이 황폐해져 우리 폐에 먼지가 쌓여 가니, 그제서 겨우 배운다.

새만금 사업의 목적은 농경지였다. 김대중 정부는 쌀 부족을 이유로 새만금 간척사업을 강행한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쌀은 부족하지 않고 오히려 남아 돈다. 남아 돌아 정부는 매년 엄청난 농지를 용도변경해주고 있고 이제는 대대적으로 휴경농에 대한 보상제도까지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도 세계적인 개펄에 엄청난 돈을 들여 차린 죽음의 굿판을 멈추지 않다니.

어떤 사업이든 목적이 사라졌으면 처음부터 다시 검토해야 한다. 논란이 되지 않은 사업의 경우도 그러할진대 거대한 반대에 직면한 사업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다. 농지가 목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면 지금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즉각 중단하고 새만금 문제의 합리적 해결을 위한 새로운 정책 기구를 긴급히 만들어 처음부터 다시 논의해야 하는 것이다.

이 주 향 수원대 인문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