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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로베르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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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로베르네 집

입력
2003.05.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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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아 지음·시공사 발행·1만2,000원

파리에 가면 1구에는 반드시 들러야 한다. 루브르 박물관과 노트르담 성당, 파리 시청, 법원 같은 근사한 건축물이 센 강을 끼고 있는 곳이다. 몇 분 거리에 퐁피두 센터가 있으며, 쇼핑객이 복작대는 백화점과 상점이 그득하다. 그리고 리볼리가 59번지도 놓치지 말라.

이 집은 외관부터 별나다. 7층 건물 전면에 양철로 만든 커다란 눈 코 입이 붙어 있다. 빨강 노랑 연두색 물고기와 예쁜 꽃이 매달린 그물도 걸려 있다. 글자가 쓰인 천이 보이는데, 이런 내용이다. '로베르네 집, 자유로운 전자(Chez Robert, Electron Libre)', '가난은 범죄가 아니다(La Pauverte n'est pas un crime)'. 이 멋진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 자유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린다.

파리에서 비디오 작업을 하고 있던 비디오 아티스트 장은아씨는 지난해 여름 멕시코 친구의 소개로 로베르네 집을 방문했으며, 이 집에 가득한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59 리볼리 바이러스'다! 두 달 여 로베르네 집을 들락거리면서 장씨의 병은 점점 악화했다. 그는 자신을 앓게 한 바이러스를 가득 담은 로베르네 집 가이드북을 고국으로 보내왔다. '로베르네 집'은 이곳에 몸과 영혼을 함께 두고 있는 예술가 16명의 목소리다. 그들은 가난하고 초라하고, 유쾌하고 행복하다.

1999년 11월1일 밤 칼렉스(Kalex), 가스파르(Gaspard), 브루노(Bruno) 등 세 명의 예술가가 리볼리가 59번지의 폐쇄된 빈 건물을 점거했다. 그리고 리볼리가 59번지가 자유로운 예술 공간이 되었음을 선포했다. 이 세 명은 보통 이니셜을 따서 KGB로 통하는데, 구(舊) 소련의 악명 높은 비밀경찰 조직 KGB와 공교롭게 같다. 물론 아무 상관도 없지만. 버려졌던 공간에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쓰레기로 가득 찼던 건물이 유쾌한 무법자들의 아틀리에로 바뀌었다. '로베르네 집, 자유로운 전자(電子)'라는 이름이 붙은 이 공간은 일반인에게도 공개됐다. 누구나 작품을 감상하고 작업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얘기를 나눌 수 있는, 파리의 또 하나의 명소가 됐다.

사실 좀 복잡한 현실적 문제가 있긴 했다. 법적 건물주였던 프랑스 정부가 경찰에 신고를 했고 소송을 제기했다. 언론이 불법 점거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됐고, 순수미술협회가 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시작했으며, 새로 선출된 파리 시장이 로베르네 집을 매입해 예술가들에게 공간을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로베르네 집은 이렇게 합법화 과정을 밟고 있으며 파리의 현대미술 명소 중 세번째로 많은, 연간 4만 명의 관람객을 맞고 있다.

벽은 낙서와 그림으로 가득하고 곳곳에 상상을 뛰어넘는 작품이 놓여 있다. 벌거벗은 여자를 그려넣은 욕조, 흙으로 빚은 컴퓨터와 마우스, '제 작품을 사주지 않아 감사합니다'라는 문구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 '위험한' 바이러스는 로베르네 집에 살고 있는 예술가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무엇'이다. 이들은 한국에서 온 예술가에게 입을 모아 말했다. "장식을 떼어 버려. 그리고 네 발을 죄고 있는 구두를 벗어서 불 속에 던져. 이 세상은 너를 위한 장소이고 너의 의무는 행복해지는 거야."

설치미술가 브루노에게 로베르네 집을 점거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아니. 절실한 필요에 의한 행동이었으니까. 내가 가진 거라곤 고작 비를 피해 잘 수 있는 좁은 공간과 최소한의 식사를 할 수 있는 돈이 전부였어. 누군가가 절박한 현실에 놓여서 무엇인가를 필요로 한다면,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은 일종의 의무이자 꼭 해야 할 일이 되지." 그렇게 자리잡은 로베르네 집을 두고도 브루노는 "지겨워지면 망설이지 않고 떠날 거야"라고 말한다.

파스칼은 진종일 시끄러운 테크노 음악을 들으면서 작업하다가도 밤이 되면 고요한 밤하늘의 별을 관찰하는 화가다. 창조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철학자 들뢰즈를 인용하면서 "사회를 분석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컨셉을 만드는 것"이라고 답한다. 미래의 계획을 묻자 조각가 칼렉스는 "숨쉬는 것, 자유롭게 사는 것"이라고 짧게, 힘있게 말한다. 슬로바키아 출신인 린다는 캔버스에 밝은 노란색을 칠하다가 눈물을 흘린다. 지금 칠하고 있는 노란색이 자기와 너무 대조되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고 했다. 불안한 나라 아르헨티나에서 온 피투는 언제나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로 웃는다. 그 밝은 얼굴에는 50여 년 군부독재 정치에 시달렸던, 극심한 경기 침체를 겪고 있는 고국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피투의 미소 속에 감춰진 눈물을 보고 장은아씨는 "너무 슬퍼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슬픔을 안다. 슬픔을 아는 사람은 그 슬픔을 감출 줄 안다. 하지만 슬픔을 모르는 사람은 그걸 감추는 법도 모른다"고 적는다.

로베르네 집인데 로베르는? 건물 밖의 간판 '로베르'는 예술가들이 점거하기 전부터 붙어 있던 것이다. "이 건물을 폐쇄하기 전에 있던 상점의 이름일 거야. 그 간판을 발견하고 로베르네 집이라고 부르기로 했지." 로베르네 집의 공식 대변인 가스파르의 설명이다. 로베르 소시지 가게나 로베르 빵집처럼, 로베르는 프랑스에서 흔한 이름 중 하나다. 그 이름은 그러나 특별하다. 프랑스 파리 리볼리가 59번지 '로베르네 집'은 '59 리볼리 바이러스'로 가득찬 곳이다. 그 바이러스의 다른 이름은 '자유'이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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