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욱 지음 문학과지성사 발행·9,000원
"그날 하늘은 청명했고 마음은 지옥 같았다. 시간이 지나도 실연의 고통이 흐려지지 않았다. 캠퍼스를 걸어 내려오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은 터질 것 같은데 머리가 서늘하게 맑았다. 그 기분이 꽤 마음에 들었다. 하숙방으로 가는 길에 노트 한 권과 볼펜 한 자루를 샀다. 책상에 앉아 무언가 적기 시작했다. 스물 두 살 때였다."
그의 글쓰기는 아주 사소하게 시작됐다. 김경욱(32)씨가 자전소설 '미림아트시네마'에서 고백한 얘기다. 등단 10년 째인 김씨가 소설집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를 펴냈다. 단편 12편을 묶은 세 번째 창작집이다. 김경욱씨의 작품 세계를 두고 "영상 세대의 영화적 상상력"(평론가 김성곤)으로 평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 영화가 작품의 소재로 자주 인용되는 부분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그의 소설은 한 장면 한 장면의 전환이 영화를 보는 듯하다. 문체는 감수성으로 무장하기보다 일련의 이미지를 좇아가는 묘사에 가깝다. 새 창작집에 실린 작품들 또한 그렇다.
표제작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는 팝 그룹 너바나의 가수 커트 코베인의 의문에 싸인 죽음을 언급하면서 시작되는 어떤 남자의 이야기다. 남자가 비행기 안에서 TV드라마 '장밋빛 인생'의 주연 탤런트 '장미'를 만났다. 실은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남자는 자신을 사진작가라고 소개했다. 두 사람은 짧은 대화를 주고받았으며 남자는 장미가 놓고 간 휴대전화를 챙겨두었다. 다른 한 남자가 비행기 안에서 '장미'라는 여자를 만났다. 여자는 평범한 도서관 사서였으며 남자는 사진작가였다. 사진작가와 사귀었던 사서 장미는 우연한 계기로 탤런트가 되었고 옛 애인은 잊혀졌다. 사진작가와 사서 장미의 이야기는 드라마 '장밋빛 인생'의 내용이기도 하다. 탤런트의 전화를 챙긴 남자는 장미에게 연락을 해 만나기로 약속했다. 두 이야기는 번갈아 전개되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하나로 겹쳐진다. 남자는 드라마 촬영을 하던 탤런트 장미를 납치해 "다시 시작하자"며 애원하고, 장미는 "이건 드라마가 아니야"라고 울부짖는다.
이런 구성은 단편 '거미의 계략'에서도 응용된다. 사체로 발견된 작가 김주은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는 김주은이 남겨놓은 소설과 흡사한 것처럼 보인다. 가상과 실제가 혼동되는 이런 구성은 영화에서는 이미 자주 쓰여진 것이다. 차갑고 담담하게 전개되는 이야기에서 도드라진 주제 의식을 찾기란 수월치 않다. 평론가 김병익씨는 그의 작품을 두고 "오늘의 우리 시대가 펼치고 있는 황량한 세계 속을 살고 있는 인터넷 세대의 쓸쓸한 내면 풍경"이라고 풀이한다.
마지막에 실린 '미림아트시네마'는 소설이라기보다 에세이로 읽혀진다. 그가 들려주는 지나온 삶 속에는 문학에 대한 젊은 작가의 고민과 사유가 소박하지만 진솔하게 녹아 있다. 김씨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장편 '노르웨이의 숲'에서 밝힌 서문을 인용하는 것으로 소설을 시작한다. "내가 여기서 그려내고 싶었던 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이 소설의 간명한 테마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와 동시에 하나의 시대를 감싸고 있었던 공기라는 것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평론가 김병익씨가 '콤플렉스 없는 세대'로 부르는 1990년대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김경욱씨는 물론 실제 세계가 가상현실 같은, 매우 영화적인 우리 시대의 한 풍경을 그리는 데 힘을 기울이는 작가이며 그것은 그의 작품 세계의 중요한 특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자의식으로 가득한 자전소설은 묘하게도 다른 작품들 위에 비죽이 솟아 구별되는 울림을 준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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