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과 노 정부의 사람들은 말을 잘 한다. 한 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대선 TV토론 때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어려운 정책사안에 대한 대통령의 임기응변에 정말 놀랐다는 말을 했다.그러나 새 정부 출범 이후 말썽이 된 말들은 대체로 이렇게 순발력있는 임기응변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구업(口業)을 쌓아가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노무현 정부는 자주 설화(舌禍)를 빚었다. 그 자신도 말을 많이 하는 정무수석이 대통령에게 너무 말이 많다고 했을 정도니 이제는 말을 하는 문제가 코드가 맞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민거리가 됐나 보다. 5월 1일의 TV토론에서 노 대통령은 말 많음에 대해 "참 고민이다. 말이 의사전달 수단인데…"라고 했다. 그리고 어떤 질문에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말에 관한 금언과 고사는 어느 것이든 말조심을 강조하고 있다. 당(唐)이 망한 뒤에도 벼슬을 하고 천수를 누린 풍도(馮道)라는 사람은 혀를 노래한 설시(舌詩)를 남겼다. 입은 화의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口是禍之門 舌是斬刀身)이라는 내용이다. 율곡의 '격몽요결(擊蒙要訣)'에 나오는 군자가 갖춰야 할 아홉 가지 자세, 즉 구용(九容)에는 구용지(口容止)가 들어 있다. 필요하지 않을 때는 입을 다문다는 뜻이다. 또 조선시대의 한 시조는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로 끝난다. 말이 많아 문제라면 이 시조처럼 말을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 대통령은 함부로 말을 해서도 안되지만 말을 안 하면 더욱 안되기 때문에 어려움이 생긴다. 대통령의 말은 토씨 하나가 중요하며 국정에 직결된다. 노 대통령이 이번 토론에서 "TV가 아니었으면 대통령이 됐겠느냐"고 했다는 발언에 대한 질문을 반기면서, "1988년 5공 청문회때 TV를 통해 알려진 덕에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는 뜻"이라고 해명할 수 있었던 것은 본인에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경우도 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5·16쿠데타 보고를 받고 "올 것이 왔구나"라는 말을 했다고 구설수에 올랐다. 일각에서는 쿠데타세력과의 야합설까지 제기하고 있었다. 그는 "온다던 것이 왔구나"라고 말했다고 해명했다. 쿠데타를 반긴 게 아니라 우려가 현실화했다는 뜻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는 "올 것이 왔구나"로 정착돼 버렸다. 필요한 말만 제 때에, 일정한 격을 갖추어 하더라도 그대로 전달되기는 이처럼 매우 어렵다. 말을 하는 것은 그래서 쉽지 않다.
게다가 말의 외표(外表)와 내용이 맞지 않는, 이른바 시니피앙(記表)과 시니피에(記意)가 상반되는 경우는 적대감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선의가 결여된 언사(言辭)는 말할 것도 없다. 아무리 긍정적인 취지나 위트였다 해도 "1급은 할 만큼 한 사람들이다. 집에 가서 건강 회복하고 공부하고 배우자와 함께 놀러 다닐 필요도 있다"고 한 인사보좌관의 말은 "1급은 집에 가서 애나 봐라"로 변환될 수밖에 없다. 고영구 국정원장 임명을 강행하면서 야당의원들이 모욕을 느끼게 한 대통령의 발언에도 국정원 개혁의 충정을 성실하게 호소하려는 선의는 없었다. 어버이날을 맞아 각계에 보낸 이메일 중 '잡초 정치인'이라는 말도 불필요하거나 과도한 긴장관계를 스스로 조성한 표현이다.
말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말이 많으냐 적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말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조지 워싱턴이 말을 잘 했던 대통령은 아니었지만, 그는 말을 할 때 주의할 사항으로 8가지의 금언을 남겼다. 어떤 상대에게도 악의가 들어 있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첫번째다. 노 대통령의 TV토론 발언의 대강은 선의를 믿고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누구나 선의를 발견할 수 있게 말하는 법을 고치는 게 좋다. "나는 아무래도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임 철 순 논설위원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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