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5월9일 마틸다 앨리스 빅토리아 우드라는 이름의 15살 난 소녀가 런던의 술집 겸 호텔 로열 이글 태번의 그리션 어셈블리 룸에서 발라드 두 곡을 불렀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이글 태번의 파트타임 웨이터였다. 아이는 벨라 델라마레(이탈리아어로 '바다의 미인'이라는 뜻)라는 그럴싸한 예명을 썼지만, 난생 처음 무대에 서는 터라 돈을 한 푼도 받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벨라 델라마레가 '시간은 흐르고 있네'와 '내 여군(女軍) 애인'을 부르고 났을 때, 귀 밝은 취객들은 자신들이 한 위대한 재능의 출현 현장에 입회했었다는 것을 깨닫고 열광했다. 이글 태번 측은 즉시 델라마레를 그리션 어셈블리 룸의 고정 가수로 채용했고, 델라마레는 얼마 뒤 예명을 마리 로이드로 바꿨다. 영국이 낳은 가장 유명한 뮤직홀 가수의 커리어는 이렇게 시작됐다.그 뒤 한 해도 못 되어 마리 로이드라는 이름은 영국 전역에 퍼졌고, 다시 다섯 해 뒤에 마리 로이드는 런던의 다섯 개 뮤직홀에 고정 출연하는 일급 가수가 돼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이내 영국 바깥으로 퍼져 나가, 마리 로이드는 파리나 베를린 같은 유럽 도시들만이 아니라 남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미국의 여러 도시로 공연 여행을 다녀야 했다. 팬들은 그녀를 '우리 마리'라고 불렀고, 신문은 그녀를 '뮤직홀의 여왕'이라고 표현했다.
마리 로이드의 명성이 그 재능에 걸맞았다는 것은 시인 엘리어트도 증언하고 있다. "뮤직홀 청중들의 삶을 예술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표현하는 데 마리 로이드 만큼 성공적이었던 연예인은 없었다. 그녀의 공연을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의 영혼을 표현할 줄 아는 이런 능력이다." 마리 로이드는 1922년 10월7일에 작고했다. 공연 중에 무대 위에서 쓰러진 지 사흘 만이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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