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문화기획 시리즈 '누림'을 시작합니다. '누림'은 우리 문화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문화를 직접 창조·생산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인 문화 소비자나 단순한 마니아보다는 한 차원 높게 문화를 즐기고 또 적극적으로 피드백에 관여하는 깨어있는 문화 향수층, 그들은 문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공연 미술 문학 출판 영화 방송 가요 등 우리 문화 각 분야의 생생한 현장 보고가 될 것입니다./편집자 주
판소리 명창 공연에 가면 어김없이 '귀명창'이 있다. 귀명창은 판소리를 직접 하지는 않지만 판소리의 좋고 나쁨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최고의 관객이다. 그들은 좋은 대목에서는 "얼씨구"라며 적절한 추임새로 흥을 돋구고, 실력이 떨어질 때는 냉엄한 평가를 내린다.
인터넷 사이트 프리챌의 뮤지컬 커뮤니티 '송 앤 댄스'도 뮤지컬계의 귀명창이 모인 단체다. 2000년에 만들어졌다. 최근 뮤지컬 배우 남경주와 S.E.S의 전 멤버 바다가 주인공인 뮤지컬 '페퍼민트'의 프리 프로덕션 발표회가 있었다. 뮤지컬을 제작하기 전 오피니언 리더들의 반응을 보고 제작 방향을 정해나가는 단계인 프리 프로덕션에 송 앤 댄스 회원들이 초청되기도 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송 앤 댄스의 스태프들을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2000년에 신시뮤지컬컴퍼니가 제작하고 최정원, 남경주씨가 주연배우로 출연한 '렌트'가 뮤지컬을 제대로 보기 시작한 첫 작품이었죠." 송 앤 댄스에서 뮤지컬 감상회, 인터뷰 등을 맡은 권영이(24)씨의 말이다.
커뮤니티에서 같은 역할을 맡은 박윤정(23)씨의 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저도 비슷한 시기에 가수 신성우씨가 출연한다는 뮤지컬 '드라큐라'를 보게 되었죠. 좋아하는 마음에 고가의 표를 예매해서 샀는데 더블 캐스팅인 김성기씨가 나와서 처음에는 좀 실망했어요." 그러나 "너무 연기가 좋아 뮤지컬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저도 남경주, 최정원씨가 주연한 '키스 미 케이트'가 첫 작품이었어요. 우리는 모두 비슷한 시기에 뮤지컬에 입문했네요"라며 단체 관극과 노래모임을 맡고 있는 조성희(25)씨가 웃는다. 각각 디자인, 작곡을 전공한 박씨와 조씨는 공연 포스터나 노래모임 반주를 맡는 등 커뮤니티에서 전공을 활용하고 있다.
뮤지컬 마니아라고 불리는 이들도 처음 시작은 친구 따라 혹은 어쩌다 공연장을 찾은 평범한 관객과 다르지 않았다. 인터뷰 전에 이들이 굉장히 특별할 것이라고 생각한 기자의 선입견을 깨트리는 순간이었다. 세 사람의 내공은 수 년간 뮤지컬에 열광하며 작품을 꾸준히 보아온 결과 자연스럽게 축적된 것이었다.
그 동안 나름대로 모임의 색깔도 생겼다. 창작 뮤지컬, 정확히 말한다면 '몽유도원도' 등의 대형 창작뮤지컬이 아닌 소극장 창작 뮤지컬에 대한 애정이 그것이다. 괴테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창작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같이 본 게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베르테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만난 이들은 베르테르의 제작진과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며 창작 뮤지컬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창작 뮤지컬은 수입 라이센스 뮤지컬에 비해 100배는 더 힘들다"는 서울 뮤지컬 아카데미 배해일 대표의 말처럼 외국의 완성된 노하우를 재현하는 수입 라이센스 뮤지컬에 비해 창작 뮤지컬은 당장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기는 힘들다. 권씨는 "수입해와서 노하우를 배운다고 하는데 그걸 몰라서 창작물을 하나요"라고 반문한다. 10년 앞을 보지 못하고 창작물의 기반을 고사시키는 우리 뮤지컬계의 현실을 비판하는 말이다.
송 앤 댄스는 우리 창작 뮤지컬을 키우기 위해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한다. 정보 제공이나 감상후기, 칼럼 싣기 등은 다른 모임에도 있지만 창작 뮤지컬 출연 배우와의 인터뷰는 송 앤 댄스만의 자랑이다. 인터뷰 대상도 스타보다는 성실하고 개성있는 조연이나 신인들이 중심이 된다. 커피숍을 빌려 5∼10명 정도가 참여하는 송 앤 댄스의 그룹 인터뷰를 거쳐간 서영주, 김선경, 김성기씨 등은 현재 국내 뮤지컬 무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뮤지컬을 처음 접하는 회원들이 싸게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단체 관극에는 5,000여 명의 전체 회원 중 많게는 평균 100여 명의 회원들이 참석한다. 회원들을 위한 소극장을 세우자는 의견까지 나왔을 정도이다. 1주일에 2시간인 노래모임은 최인천, 김선미씨 등 뮤지컬 음악강사를 초빙해 초보부터 준 전문까지 단계적으로 가르친다. 지금까지 축적한 뮤지컬 악보는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귀한 것들이다.
"늦었습니다." 남자 스태프 이성원(34)씨가 등장했다. 5,000여 명의 회원 중 남자는 30% 정도이고 8명의 스태프 중에는 두 명뿐이다. 어쩌면 20대에서 30대 초반까지의 여성이 대부분인 공연 관객층에서 이씨의 존재는 특이하다고 할 수도 있다.
공무원인 이씨는 "보수적인 직장에서 접하기 힘든 문화를 경험할 수 있어 좋다"고 말한다. "영화도 좋지만 생음악이 주는 뮤지컬의 매력에 끌렸다"는 이씨는 "다 좋지만 티켓 가격 때문에 가장으로서 허리가 휩니다"라고 너스레를 떤다. 직장인인 권씨도 "공연시간 때문에 정시퇴근하면 눈치 보인다"며 아쉬워한다.
"뮤지컬은 음악, 춤 등 여러 장르가 공존하는 게 매력이죠. 눈과 귀가 즐겁습니다."(박) "뮤지컬을 처음 보시는 분들은 첫 작품의 느낌이 좋아야 해요. 재미있는 작품을 보면 할머니도 신나서 박수를 치시더군요."(조) "5감을 다 만족시키는 작품, 음악과 스토리가 잘 어우러지는 '레 미제라블' 같은 작품이 좋죠."(권) "후각은 아니잖아요? '델라구아다'도 아닌데, 하하."(박) 뮤지컬의 매력은 송 앤 댄스의 회원들을 오늘도 공연장으로 이끈다.
/글·사진 = 홍석우 기자 muse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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