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인간에게 물려준 자연을 지키기는커녕 파괴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며 범죄입니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이한열 군을 친구들이 부축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로 주목 받았던 현장미술가 최병수(43)씨는 이제 누구나 인정하는 '새만금 지킴이'다.
붓과 끌로 국내는 물론 지구촌 곳곳을 누비며 환경보호 목소리를 높여온 그가 새만금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2000년 3월. 전북 무주군의 의뢰로 반딧불이 축제를 준비하다 '간척사업 반대 장승제'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내려가 1주일간 밤을 새워 장승을 만들어 준 게 시작이었다.
"간척사업이란 게 알고 보면 멀쩡한 산을 파헤쳐 돌과 흙을 캐내고 그걸로 살아있는 갯벌을 모두 메우는 말 그대로 산과 바다 모두를 죽이는 사업 아닙니까. 어찌나 화가 나던지." 70여 개의 장승을 함께 세운 동료들은 장승제가 끝난 뒤 모두 돌아갔지만 그는 하던 일이며 서울의 작업장까지 모두 정리하고 눌러앉았다. 부안군 하서면 돈지의 허름한 창고건물이 3년째 써온 그의 작업장이다.
하지만 그의 활동반경은 더욱 넓어졌다. 지난해에는 남아공에서 열린 '리우+10 세계 정상회담'에서 환경보호 퍼포먼스를 벌였고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에는 바그다드를 찾아 반전 작품전을 열기도 했다. 3월부터는 부안을 떠나 북한산에 임시로 머물고 있다. 북한산 관통도로 공사 저지를 위해 환경단체 회원들과 함께 경기 양주군 송추의 비닐하우스에 기거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 그래도 그의 둥지는 여전히 새만금 갯벌이다.
"해창 갯벌에 서면 사라져가는 생명체의 아우성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신이 인간에게 물려준 갯벌을 우리 스스로 파괴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간척사업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해창 갯벌은 그의 전시실이자 갯벌을 지키는 '투쟁의 현장'이기도 하다. 현장에는 3년 전 그와 동료들이 갯벌을 살리자는 염원을 담아 세운 70여 개 장승들이 우뚝 서있다. 갯벌에 온갖 형상으로 서있는 솟대와 장승들로 해창 갯벌은 이제 '장승벌'로 불리며 명소 아닌 명소가 됐다. 하지만 한 풀만 벗겨보면 환경파괴에 대한 분노가 알알이 배어있다. '새만금 대장군', '갯벌 여장군', '갯지렁이 대장군' 등 장승들의 근엄한 얼굴과 솟대에 걸린 망둥어와 꽃게의 우울한 풍경에는 사라져가는 갯벌에 대한 분노와 슬픔이 가득하다.
그는 영국의 더 타임스 등 세계의 매스컴이 주목하는 세계적인 현장 미술가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한국의 걸개그림을 설명하면서 그를 대표적인 인물로 거명하고 있을 정도다. 미술전문지 '가나아트'가 선정한 '근현대 미술인 베스트 100'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원래 가난때문에 중학교를 중퇴한 뒤 중국집 배달원, 선반보조공을 전전한 날품팔이 목수였다. "1986년 대학생들이 정릉에서 벽화 그리는 것을 도와주다가 경찰서에 잡혀갔는데 아무리 목수라고 말해도 경찰관이 막무가내로 직업란에 '화가'라고 써넣더군요. 졸지에 날품꾼에서 '화가'가 된 겁니다. 그것도 '관제화가' 말이죠." 이 사건은 그가 사회문제에 눈을 뜨는 전환점이 됐다. 이후 그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시위현장에 필요한 그림 등을 그렸고 도움을 청하면 어디든 찾아갔다. 당시 붙은 별명이 '바리케이드 화가'다.
체계적인 미술교육을 받지않았음에도 세계가 주목하는 현장미술가로 성장한 것은 그의 말대로 힘 없고 소외된 이들의 분노와 슬픔, 현장의 열기를 누구보다 뜨겁게 느끼는 열정 덕택이다. "도움이 필요하면 어디든 찾아가겠지만 간척사업이 중단될 때까지 새만금 갯벌이 나의 집입니다." 영원한 환경지킴이가 되겠다는 그의 각오다.
/부안=최수학기자 s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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