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세인들의 관심은 인민혁명당(인혁당)의 조직적인 실체가 존재했는가 아닌가에 모아지고 있다. 존재했다고 하면 당시 정부의 발표가 맞는 것이며 조작이 아닌 것이 된다. 실체가 없었다면 죽은 사람은 개죽음이다. 그 엄혹한 시절에, 4·19혁명 이후에 활동했던 사람들은 5·16과 더불어 의지와 소망을 팽개치고 생활전선에만 있었다는 얘기냐. 조직적인 실체에 관해서는 훗날 얘기가 될 것이고, 다만 인혁당에 관련되었던 사람들의 생각이 무엇이었고, 4월 혁명 이후에 했던 일들이 어떤 것이었고, 그들이 어떤 사회를 꿈꾸었는가를 얘기하자.그것은 단순한 조직사건 정도가 아니라 해방 직후부터, 아니 일제치하부터 면면히 이어져오던 민족해방운동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분단이 되면서 지하로 들어갔던 도도한 민족사의 흐름이 4·19를 맞으면서 지상으로 나왔으나 5·16에 의해 된서리를 맞게 된다. 그러나 민족해방운동의 일관된 흐름은 끊어질 수 없다. 억압이 있는 곳에는 저항이 있게 마련이니까." 1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지 6개월만에 무죄를 선고 받았던 김금수(金錦守·66·현 노사정위원장)씨의 말이다.
64년 8월 14일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은 "북괴의 지령을 받은 대규모적 반국가단체인 인민혁명당이 국가 전복을 꾀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17일 중정은 도예종(都禮鍾·당시 39·전직 교사) 등 41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이들은 당시 혁신계 인사들과 진보적 언론인, 교수, 6·3 시위를 리드한 대학생 등이었다.
중정으로부터 피의자와 조사자료를 넘겨받은 서울지검은 20일간 추가 수사를 벌였다. 당시 공안부는 이용훈(李龍薰) 부장과 최대현(崔大賢) 김병리(金秉璃) 장원찬(張元燦) 검사였다. 이 부장과 담당 검사들은 '인혁당이란 반국가단체는 중정의 조사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며, 아무런 증거가 없는 허구'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들은 사표까지 제출하며 불기소 의견을 고집했다. 이른바 검찰의 항명 파동이었다. 공안부에서 기소장에 서명할 수 없다고 버티자 서울지검장은 구속마감일인 9월 5일 밤 숙직 검사에게 기소할 것을 명령했다. 인혁당 사건 수사와 전혀 관계가 없던 형사3부장이 서명해 26명을 기소했다. 대리 서명 기소가 알려지면서 공안부 검사들의 항명 사실이 드러났다. 인혁당 사건의 조작설과 피의자들에 대한 혹독한 고문설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검찰은 수사라인을 서울지검에서 서울고검으로 교체했다. 재수사를 맡은 한옥신(韓沃申) 고검차장은 대학생 전원을 포함한 14명의 공소를 취하해 석방하고, 12명에 대해 공소장 변경을 신청했다. 국가보안법 대신 반공법(반국가단체 찬양고무) 위반 혐의였다. 당시 한 차장은 "피고들이 북괴의 남파간첩과 접선했다는 증거는 없으나, 북괴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한 혐의는 있다"고 밝혔다. 검찰은 또 중정의 수사기록을 백지화하고 고문 여부에 대한 본격 수사에 들어갔다고 발표했다. 한 차장은 "피고들이 고문 당한 사실을 밝혀냈으나 가해자의 신분과 인상을 기억하고 있지 않아 조사에 애로가 많다"고 말했다. 이듬해 1월 25일 서울지방법원은 도예종(3년형) 등 2명에게만 실형을 선고하고 다른 피의자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 양심에 판정패 당한셈"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70년대 후반 미국에서 김경재(金景梓·현 민주당 의원)씨와 공동집필한 회고록에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다음은 요약).
학생 데모의 선언문 등에서 나는 북한 공산주의자, 혹은 좌경 급진주의자들이 사용하는 구호가 있음에 주목했다. 배후를 캐는 과정에서 62년 초 북한 노동당의 지령에 의해 남한에 인민혁명당이란 비밀조직이 결성됐고, 이들이 6·3 학생 데모에 깊이 개입했다는 정보를 포착했다. 홍모 5국장에게 이러한 보고를 받고, 이모 대공과장에게 실무를 맡겼다. 8월 14일 나는 기자회견을 갖고 인혁당 사건을 발표했다. 9월 5일 대공과장의 보고를 받았다.
"오늘이 구속 만기일인데 인혁당 관계자들이 기소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 학생들은 집어 넣었나. 오죽하면 검사들이 기소를 못한다 하겠나."
"심증은 뚜렷하나 물증이 약하고, 그들이 워낙 노회하여 입을 열지 않습니다."
"○○○검사를 찾으시오."
그는 나의 심복처럼 일하던 유능한 검사였다. 대공과장이 전화를 연결했다.
"당신, 도대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 거요?"
"죄송합니다. 저는 기소 요건이 충분하다고 주장했습니다만, 부장이 완강히 반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맘 먹고 그렇게 세게 나오지?"
"반공도 좋지만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부장의 뜻과 다르다며 사의를 표명하기까지 했습니다."
"검사장에게 전하시오. 재판 결과야 어떻게 되든 한 명이라도 기소해야 할 것 아니오."
"알겠습니다. 단단히 전하겠습니다. 중정 조사가 너무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또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날 저녁 서울지검장은 숙직 검사에게 지시해 전원을 기소했다. 한시름 놓았지만 중정은 크게 망신을 당했다. 이 부장이 손을 떼고 한옥신 서울고검 차장검사가 사건을 인계했다. 한 차장은 한 때 중정에 파견되어 나와 함께 일했던 검사였다. 그러나 한 차장 마저 난색을 표했다. 공소장을 변경하고 학생들은 석방시키라고 지시했다. 10월 16일 학생들을 제외한 12명에 대해 공소장 변경 신청을 냈다. 중앙정보부와 검찰은 사실상 과오를 자인한 것이다.
11월 14일 인혁당 기소를 거부한 이용훈의 사표가 수리됐다. 사실상 압력을 받아 강제로 물러난 것이었다. 65년 1월 20일 서울지방법원은 도예종 등 2명에게 실형을 언도하고, 나머지 모두를 무죄 판결했다. '비밀 서클을 조직한 사실은 확인되었으나 인혁당 강령을 알았다는 점 등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나는 살아있던 검찰의 양심에 판정패를 당한 셈이었다. 숙직을 하다 인혁당 관계자를 기소한 검사를 중정 5국 부국장으로 기용했다. 혼란한 상황일수록 부하를 채용하는 기준은 능력보다 충성심 위주로 바뀌는 법이다.
정병진 편집위원 bjjung@hk.co.kr
● 장원찬 당시 공안검사
인민혁명당이란 명칭을 보았을 때 굉장한 사건으로 알았다. 의욕을 갖고 덤볐다. 공안부장 아래 3명의 검사가 수사를 맡았다. 혁신계 인사와 대학생들이 나의 담당이었다. 덕수궁 옆 청사 뒷마당에 콘센트 막사를 만들어 별도의 사무실로 썼다. 당시 한 방에 검사 3명씩 있었으므로 수사상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 하루종일 수사하고 부장 방에 모여 의견을 교환했다. 대개 조직범죄의 경우 수사 당국이 직접 혹은 공작원을 통해 수집한 회합 사진이나 녹취한 발언, 혹은 강령 등을 적은 유인물이라도 첨부돼 있기 마련인데 그런 것이 하나도 없었다. 말로만 갖고 수사기록이 이뤄져 있었다. 중정에서 20일 이상 수사를 했다는데 그 흔한 불온서적이나 판금서적 한 권 없었다. 수사가 진전되지 않았다.
나는 도예종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20일간 수사를 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차 마시고 밥 먹고 지냈다. 인혁당이란 명칭이 초점이었다. 유도신문을 위해 잡담과 농담도 했고, 국제정세까지 논의했지만 그의 입에서 인혁당이라는 말은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제가 미쳤습니까. 그런 표현 내세우면 모두 도망갑니다. 당을 만들려면 경계심을 일으키지 않는 이름을 썼을 것 아닙니까. 평화나 개혁, 사회와 같은 부드러운 명칭이 좀 많습니까. 설사 북한의 돈을 받아서 만들더라도 혁명이란 표현, 더구나 인민이란 이름을 어떻게 사용합니까." 내가 생각해도 맞는 말이었다. 자기들끼리 모여 대화하는 과정에서 베트남의 인민혁명당 이야기가 오르내렸을 수는 있었겠지만 인혁당을 만들려고, 혹은 만들었다고는 심증조차 생기지 않았다.
5·16 직후 혁명재판소가 설치됐을 때 나는 군법무관으로 참여해 사상문제를 담당했다. 혁명재판소는 국내 모든 용공분자, 혁신계와 좌익의 단체와 조직을 다루었다. 나는 그들이 누구며 어떠한 생각을 갖고, 어떻게 조직을 만드는지 알고 있었다. 5·16 정부가 총망라해서 조사한 결과 북한과 관계 된 것은 사회당과 조총련 자금을 받은 민족일보, 딱 2건이다. 나머지는 일반 혁신계다. 남파간첩과 민족일보 관련자 등 2명이 사형을 당했으며, 그 외 주요 사상범들은 계속 감옥에 있었다. 도예종 등은 그 쪽이 아니었다. 중정에서 수사 마지막 단계에 기록을 첨부한 게 있었다. '당을 조직하고 선서문을 만들어 갖고 있었다. 검거되기 직전 선서문 종이를 씹어 삼켜 버렸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물증이 없다는 것이었다. 도저히 기소할 수 없었다.
이용훈 부장은 '검찰은 상명하복이 굉장히 중요하다. 위에서는 강력하게 기소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거기에 복종을 못할 때는 사표를 내는 것이 정도다'라고 말했다. 우리도 동감했다. 사표를 써서 주머니에 넣고 기록 보따리를 들고 검사장 방에 들어갔다. 그 때 공안검사 중 한명은 화장실에 간다며 들어오지 않았다. 검사장은 야단도 치고, 달래기도 하고, 역정도 냈다. '법원이, 판사가 할 일을 왜 검찰이, 너희들이 하려고 하느냐'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보따리 위에 사표를 얹어 놓고 나왔다. 검사장은 그날 숙직이었던 형사3부장에게 대신 기소할 것을 명령했다. 인혁당 사건 공소장에 형사3부장의 서명이 들어가는 바람에 뒤늦게 우리의 항명 사실이 언론에 알려졌다.
수사를 하면서 중정에서 넘어온 모든 서류를 카메라로 촬영했다. 나중에 중정이 자신들의 수사서류를 조작하거나 바꿔치기 해 피의자를 간첩으로 몰 경우, 내가 간첩을 옹호한 검사로 매도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필름을 비닐 봉투에 넣어 집 근처 땅 속에 묻어 두었다. 10년 뒤 2차 인혁당 사건이 터지고 한참 후까지 1차 때의 검찰 수사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잊고 지냈다. 필름을 묻었던 곳은 이미 재개발 되어 아무런 흔적도 없다.
사표가 반려됐으나 이 부장은 검찰을 떠났다. 이듬해 검찰 파동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소폭 인사가 있었다. 사표를 냈던 나와 다른 검사는 법무부 법무실과 대전지청으로 각각 발령이 났다. 화장실에 가느라 사표를 내지 못했던 검사는 상대적 공로(?)를 인정 받았다. 69년 공무원 부정부패 문제로 '서정쇄신'을 시작하면서 행정부에서 일할 검찰이 필요했다. 정부는 나를 총무처 총무과장으로 임명했다. 이후 80년 서울시 부시장에 임명될 때까지 쭉 행정부에 몸을 담았다. 이후 변호사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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