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노래를 제일 잘하는 여자 4명을 뽑아 여성그룹을 만들면 어떨까. 얼굴이 예쁘면 안될 것 같아. 아니야 좀 뚱뚱해야 돼. 만약 예뻐지려고 성형수술하면 계약위반으로 고소해야 돼. 얼굴이 좀 안 된다고 해서 노래 잘하는 사람이 노래판에서 외면당하는 것은 말도 안 돼. 가수는 노래 갖고 감동시켜야 하는데 얼굴 하나 믿고 가수 한다고 쏟아져 나오는 저런 애들 때문에 가수들이 우습게 보이는 것이라고. 만약 뮤직 비디오를 찍는다면 그런 애들이 앞에 나와 립싱크하고 실력있는 사람들이 뒤에서 노래하는 모습을 보여 현실을 고발하는 거야." 흑인음악으로 2003년 가요계에 태풍을 일으키고 있는 여성 4인조 '빅마마' 탄생의 뒷얘기. '서태지와 아이들' 출신의 음반제작자 양현석(33)은 2년 전 한 TV 쇼 프로그램을 보다가 동료인 박경진 엠보트 사장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농담으로 시작한 말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뚱뚱하고 못생긴 가수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대중 음악계에서 경력과 정상급의 실력을 인정받은 보컬리스트들이 있었다. 1995년 강변가요제 은상 수상자인 '큰 언니' 신연아(30)는 최고의 코러스팀으로 평가받는 '빈칸 채우기'의 멤버로서 수많은 앨범에 참여하고, 때로는 얼굴 예쁜 가수들의 노래를 대신 불러준 얼굴없는 가수. 하지만 '너는 몸무게 30㎏을 빼야 가수가 될 수 있다'는 모욕까지 듣는 현실에서 자기 음반은 꿈도 꾸지 못했다.
양현석과 박사장은 실력있는 뮤지션이 단 한 장의 앨범도 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세태를 뜯어 고치는 것이야말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뜻을 모았다. 물론 이들의 도전을 쉽게 수긍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음반은 만들어졌다. 타이틀곡 'Break Away'의 뮤직비디오는 예상치 못했던 반향을 일으켰다. 노래 중반부가 지나도록 빅마마의 모습은 안 보인다. 인형같이 예쁜 여자 4명이 무대에서 열심히 노래하는 척하며 박수를 받는다. 하지만 노래가 끝날 즈음 카메라가 무대 뒤로 돌아가면 빅마마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외모 지상주의를 꼬집으려는 의도에 팬들의 격려는 밀물처럼 모여 들었다.
2월초 나온 빅마마의 앨범은 한 달만에 13만장이 팔렸고 5월까지 30만장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옛날 같으면 100만장 수준이다. 'Break Away'에 이어 날이 더워지면 조금 빠른 노래 '거부'를 집중 홍보해 다시 한번 바람을 일으킬 계획이다.
이들은 지금까지 TV에 단 두 번 출연하고 1회 콘서트를 가졌을 뿐이다. 그런데도 전율을 일으킬 정도의 환상적인 화음과 보컬에 매료된 진짜 음악팬들 덕분에 음반판매와 인기순위 차트에서 1위를 질주하고 있다. 오는 10,11일 교육문화회관에서 여는 두번째 콘서트는 일찌감치 예매가 완료돼 한차례 공연을 늘렸을 정도. 양현석은 4명에게 "대중의 입맛에 맞출 생각을 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현장(신연아-빈칸채우기와 프랑스 재즈학교, 이지영-한상원밴드와 동덕여대 실용음악과)과 학교(이영현-동아방송대 영상음악과, 박민혜-동덕여대 실용음악과)에서 경험을 쌓은 이들은 완벽한 노래를 불러줬고 양현석은 한 방 강한 펀치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옛날 '인순이'에게서 느꼈던 것과 같은 감동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에서 래퍼와 댄서로서 활약했던 양현석은 자신을 '자유를 꿈꾸는 힙합전사'라고 말한다. 96년 1월 갑작스런 팀 해체후 당시의 별명을 따 '양군기획'(현 YG엔터테인먼트)을 설립하고 이후 '지누션' '원타임' '스위티' 등 힙합스타들을 제조하며 힙합군단의 면모를 확실하게 형성했다.
주위에서는 힙합전문 기획사의 성공에 의문을 가졌으나 지누션의 1집이 70만장 나가고 이후도 30만∼40만장씩 팔렸다. "무조건 힙합이 좋다. 내가 힙합을 하는 것은 운명인 것 같다"는 그는 "후배 가수들이 힙합 리듬에 몸을 싣고 자유롭게 노래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겠다는 게 음반제작자로 나선 이유이며 영원한 꿈"이라고 강조한다.
양현석의 YG패밀리는 기라성 같은 스타들로 구성되어 있다. 힙합을 전문으로 하는 YG엔터테인먼트에 '지누션' '원타임' '스위티' '세븐' '페리' 'G-드래곤' '렉시' '마스터 우' 등이 소속되어 있고 양현석이 지분을 갖고 있는 엠보트는 힙합과 함께 흑인음악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R&B 전문회사로 '빅마마' '휘성' '거미'가 있다. 이들은 지난해 16명이 YG패밀리 2집을 내기도 했다.
역시 가창력을 앞세운 휘성은 지난해 월드컵과 MP3 파동, PD 뇌물사건 등의 악재 속에서도 신인으로서 최고인 24만장의 앨범을 팔았고 4년간의 고된 훈련 끝에 금년 3월 앨범을 낸 세븐은 곱상한 얼굴과 춤 때문에 노래실력이 묻힐것을 걱정했으나 지난 4일 데뷔 6주만에 SBS 인기가요에서 '와 줘'로 1위를 해 신인으로서 최단기간에 1위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양현석은 최근의 음반시장 불황에 대해 "IMF시절에도 있던 밀리언 셀러가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이제 인기가수의 기준선이었던 30만장이 대박이라는 소리를 듣는 상황이다. MP3의 대중화로 공짜로 음악을 듣는 게 당연시되는 것도 잘못 됐지만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너무 똑같은 꼭두각시만 만든 게 더 큰 문제이다. 노래는 뒷전이고 춤 잘 추고 예쁘면 가수 만들고, 쇼프로는 립싱크만 하다 보니 이런 상황이 됐다. 음반 제작자들이 제 무덤을 판 꼴이다"라고 개탄한다.
그는 일단 일본 시장을 공략할 계획이다. 일본의 '서태지와 아이들'이라고 할 수 있는 'X재팬'과 '그레이'를 만든 언리미티드라는 회사와 손을 잡았다.
언리미티드의 마시모회장은 일본 음반제작자 24명을 데리고 와 빅마마의 3월 콘서트를 보고는 "한국 사람들은 왜 이렇게 노래를 잘 하냐"라고 놀라움을 표시하며 즉시 이들을 일본으로 초청했다. 빅마마와 세븐은 오는 20일 일본 쇼케이스에서 음반관계자 600명에게 선을 보인다. 일본만 석권하면 동남아는 문제없고 다음은 미국무대가 목표가 된다. 일본은 음반기획사의 80%가 록 전문이었으나 세계적 추세대로 R&B로 바뀌고 있으며 우타다의 첫 앨범이 800만장 판매를 기록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것.
빅마마는 이미 일본에 진출, 1주일에 한 번씩 TV에 출연하고 있다. 7,8월경에는 한국어와 일본어 영어로 만든 음반을 내놓을 예정.
YG패밀리에서는 금년중 빅마마 세븐 거미외에도 지누션과 원타임이 여름에 각각 4집을 내는 등 모두 10장의 음반을 발표할 계획이다.
양현석이 지금까지 많은 흑인음악 가수를 키울 수 있었던 비결은 평소 언더그라운드 가수들과 교류가 많았기 때문. 덕분에 지누션 원타임 등 많은 실력있는 숨은 진주들을 찾아 낼 수 있었다. 또 미국에서 최고 전문가들과 함께 하는 믹싱작업 때문에 YG 음반의 매니아가 5만명 정도 되는 게 성공비결의 하나이다. 그는 그 동안 음반 프로듀싱과 작사에 참여했으나 지금은 사업가로서 일본 비즈니스와 앨범 컨셉 결정및 아이디어 제공만 담당하고 있다.
자신이 홍대앞에 만든 힙합클럽 nb에서 금요일 밤 DJ를 맡는 게 유일한 개인시간이자 취미활동이다. "주말에는 1,200명의 젊은이가 모여 내가 트는 음악에 감동해 소리지르는 것을 보면 피로가 풀리고 보람을 느낀다"고. 일을 좋아하다 보니 결혼할 생각을 못했고 당분간 계획도 없다.
유석근 편집위원 s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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