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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정부 비화 - 대통령의 사람들]<10>권력의 균열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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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정부 비화 - 대통령의 사람들]<10>권력의 균열 ⑦

입력
2003.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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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8월 30일 일요일 아침 7시30분께, 신광옥(辛光玉) 청와대 민정수석은 경기도 한 골프장으로 향하던 중 급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이범관(李範觀) 인천지검장(현 광주고검장)으로부터 였다. 민정수석실 국중호(鞠重皓) 행정관에 대한 구속 영장을 9시10분에 청구한다는 통보였다.신 수석은 깜짝 놀랐다. 민정수석실 자체 조사에서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더욱이 며칠 전에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게 구속 사유가 안 된다고 보고를 했었다. 국중호가 구속되면 부하 직원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책임에다 대통령에게 잘못된 보고를 했다는 지적까지 제기될 상황이었다.

신 수석은 "도대체 무슨 소리냐, 그게 어떻게 구속 사유가 되느냐, 당장 귀가 시켜라"며 강하게 항의했다. 이 지검장(사시 14회)은 검찰 선배인 신 수석(12회)이 불같이 화를 내자 "신승남(愼承男) 총장(9회)에게 말씀 하시라"며 일단 자신과의 대립을 피했다.

신 수석은 급히 차를 서울로 돌렸다. 청와대까지도 가지 않고 라마다르네상스 호텔에 방을 잡고 골프장에 있는 신 총장을 수배, 전화를 했다. 신 수석은 처음에는 통 사정을 했다. 그러나 신 총장은 "인천 지검에서 구속 판단을 내렸는데 위에서 풀어주라고 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신 수석은 감정이 격해지기 시작했다. "되지도 않는 건으로 청와대 직원을 희생시키면 나중에 그 원망은 총장이 감당해야 한다"는 은근한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도 신 총장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신 수석은 다시 최경원(崔慶元) 법무장관을 찾았다. 최 장관 역시 골프를 치다가 신 수석의 전화를 받고 그의 불구속 주장에 동의했다. 최 장관은 이 지검장, 신 총장에 전화를 하느라 3홀을 그냥 지나쳤다.

최경원씨의 얘기. "먼저 이범관에게 구속이 능사가 아니라는 얘기를 했다. '청와대 직원을 구속하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 그 곳이 힘이 있는 권부(權府)라서 눈치를 보자는 게 아니라 국정의 중심이라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석이든 비서관이든 행정관이든 누구 하나 구속되면 곧바로 대통령에 부담이 간다. 따라서 명백한 혐의가 있을 때 구속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이 지검장은 곤혹스러워 했다. 신 총장 때문이라고 생각됐다. 그래서 신 총장에 전화해 설득했으나 신 총장은 완강했다. 나는 신 수석에게 '총장이 요지부동이니 어쩔 수가 없다'고 전해주었다."

신승남씨의 회고. "인천 지검에서 구속이 불가피하다고 보고하자 대검 연구관에게 검토를 시켰다. 그 결과도 구속이었다. 그러면 법대로 하라고 했다. 신 수석은 대통령에 죄가 안 된다고 보고한 모양인데, 그런 보고를 하려면 우리와 상의를 해야지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면 되느냐. 당시 여론을 생각해보라. 다들 구속한다고 생각하는 마당에 불구속하면 청와대의 압력설이 나올 상황이었다. 그 때 이 지검장에게 영장 청구를 사전에 알리지 말라고 했다. 이범관이 마음이 약해 사전 통보하는 바람에 난리가 난 것이다. 나중에는 한광옥(韓光玉) 비서실장까지 나섰으나 '구속하지 않으면 청와대가 어려워진다'고 설명하자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3급 행정관의 구속에 불과했지만, 그 이면에는 권력과 검찰 내부의 복잡한 역학구도가 얽혀 있었다. 이범관 고검장은 "그 때 구속은 검사들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정치적 해석을 하는 것은 아주 불쾌한 일"이라고 반박하고 있지만, 국중호 구속은 검찰 수뇌진에는 갈등을, 여권 핵심부에는 상처를 안겨준 정치적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검찰의 호남 인맥 중 간판인 신승남, 신광옥 두 사람의 갈등은 회복 불능의 지경이 됐고 두고두고 DJ 정부에 보이지 않는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렇다면 검찰총장과 청와대 수석을 갈라서게 했던 국중호 구속 사건은 무엇인가.

이 사건은 2001년 7월 10일 인천공항 유휴지 64만평 개발사업에 대한 평가위원회 1차 심의에서 토지사용료로 325억원을 제시한 (주)원익이 1,729억원을 제시한 에어포트72를 제치고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면서 시작됐다. 강동석(姜東錫·현 한전 사장) 사장은 토지 사용료를 종합토지세(600여 억원)보다 적게 제시한 회사를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한 점을 문제 삼아 재심의를 요구했고 이를 거부한 이상호 개발사업단장을 직위해제 했다.

이 단장은 이에 맞서 강 사장이 외압을 받아 재심의를 지시했다고 언론에 흘렸다. 이 단장은 그 증거로 국중호 행정관이 자신과 강 사장에게 전화를 했고 김홍일(金弘一) 의원의 박상우 보좌관이 강 사장에 전화를 했다는 사실을 제시했다. 특히 김 의원의 처남인 윤흥렬(尹興烈)씨가 사장으로 있는 스포츠서울이 에어포트72의 최대주주(32%)여서 외압설은 더욱 그럴듯하게 확산됐다.

결국 인천지검이 수사에 착수했고 국중호를 2,000달러 뇌물 수수, 업무방해와 공무상 기밀누설 혐의로 구속했고 이상호도 업무방해와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했다. 그러나 2002년 8월 인천지법은 국씨의 혐의 중 뇌물수수, 공무상 비밀누설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고 업무방해 혐의만 인정했다. 국씨는 업무방해 혐의 인정에 불복하고 항소, 현재 2심 재판에 계류중인 상태다.

1심 재판부가 뇌물수수 부분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것은 관련자들이 이를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국씨의 대학 동창으로 관세청 직원이었던 한갑덕씨는 재판부에 낸 자필진술서에서 자신이 2,000달러를 받았으며 자신의 죄를 국씨에게 씌우려 했다고 고백했다. 한씨는 "인간으로 감히 할 수 없는 죄(허위진술)를 저질렀다"는 자괴의 글도 썼다.

이처럼 주요 혐의에 대해 무죄가 나온 사안을 놓고 검찰이 굳이 구속 수사를 강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더욱이 신광옥 수석의 호소를 거절하면서까지 국씨를 무리하게 구속했다는 점에서 단순 수사 차원 이상의 해석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가장 비정치적으로 보면, 여론을 의식한 구속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신 총장의 지적대로 그 때 국씨를 구속하지 않았다면 언론들이 '축소 수사'라고 치고 나왔을 것이다. 당시 언론사 세무조사가 진행되고 있어 주요 신문들이 청와대와 관련된 의혹에 날을 세우고 있었다.

이상호씨가 외압설을 제기하기 전까지 만해도 사용료를 훨씬 적게 제시한 (주)원익이 선정된 점이 도마에 올랐다. 더욱이 원익의 뒤에는 삼성이 있었다. 삼성물산은 원익컨소시엄에 9% 지분으로 참여하고 있었고 개발권을 딸 경우 에버랜드가 골프장 설계, 시공, 운영을 맡기로 돼 있었으며 원익은 매출액의 40%를 삼성 납품으로 거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외압설이 등장한 이후에는 신문들은 삼성과 원익의 로비의혹설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떨어진 업체인 에어포트72와 국씨에게 칼날을 들이댔다. 이런 분위기에서 검찰이 국씨를 무혐의 처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국씨는 다른 곳으로 불통이 튀는 것을 막기 위해 도마뱀 꼬리를 자르는 식으로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국씨는 2심 재판부에 제출한 탄원서에서 "2001년 8월 10일 자진 출두하자 대통령 차남인 김홍업(金弘業)씨가 신 총장에게 전화를 해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국중호를 잡아둬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신 총장 이 지검장에게 '국중호를 붙잡아 둬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신 총장은 "홍업씨 전화는 없었다"고 부인했다. 이런 음모설에 대한 증거나 증언은 아직 없다.

이와는 달리 당시 청와대나 검찰의 고위 인사들은 국씨 구속을 '愼―辛 갈등'의 맥락에서 해석한다. 청와대에 근무했던 한 검사는 "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았고 국중호 사건 이전인 신 총장 임명 때부터 오해와 갈등이 싹트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는 "당시 신 총장은 신 수석을 잠재적 도전자로, 신 수석은 신 총장이 자신을 미리 꺾으려 한다고 보는 것으로 비쳐졌다"고 말했다. 실제 신광옥씨는 "신 총장은 나를 사사건건 견제했다"면서 "국중호 구속은 그런 케이스"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국씨 구속은 '신―신 갈등'의 여러 사례 중 하나였으며 무죄 판결을 받은 사직동팀의 이기남 경정 구속, 단병호 민노총 위원장 구속, 검찰 인사에 대한 시각차 등 사사건건 엇박자를 드러냈다. 그리고 신광옥씨가 진승현 게이트로 구속되면서 갈등은 원한으로까지 증폭됐다. (이 대목은 다음 회에서 다룰 예정.) 이처럼 검찰권의 정점에 서있던 두 사람의 갈등은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혔고 검찰과 정권에도 심각한 타격을 가해 권력 균열을 재촉하는 결과가 됐다.

/이영성기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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