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자동차 1호로 기록된 고종황제의 승용차는 별로 이용되지 못했다. 1903년 당시 고종은 재위 40년을 기념해 광무대(지금의 새문안교회 자리)에서 열린 칭경식(稱慶式)에 승용차로 행차를 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배와 열차로 실어오는 기간이 너무 길어 행사가 끝난 몇 달 후에야 차가 도착하는 바람에 고종은 이 차를 타지 못했다. 포드사가 제작한 승용차는 지붕이 없는 4기통 캐딜락이었다. 이 '체신머리없는 괴물'은 고종이 전혀 타지 않아 이내 궁궐의 구경거리로 전락했고, 1904년 노일전쟁의 와중에 소실되고 말았다.■ 1910년 이전까지 고종 순종이 승용차를 타고 다녔다는 기록은 없다. 승용차 도입은 우리나라 탈것문화에 대변혁으로 평가될 만한 사건이지만, 시끄럽고 냄새 나는 자동차가 경망스럽게만 보였던 것이다. 황제를 비롯한 황족이 자동차를 타기 시작한 것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고 데라우치(寺內) 총독이 권유한 뒤부터라니 그것도 외세 압력의 결과였던 셈이다. 그 때까지 수입한 차의 제조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치던 열강 중 자동차생산국과 일치한다. 우리나라는 한 나라의 차만 골라 수입할 수 없는 처지였다.
■ 비행기 이용이 일반화하기 전에는 자동차가 세계화의 주요 지표였다. 토머스 L 프리드먼의 저서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도 일본 도요타의 명차 렉서스를 세계화의 상징으로, 올리브나무를 세계화에 맞서 정체성을 지키려는 성향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세계화는 덫인가 기회인가'라는 부제를 통해 구한말을 되돌아보면 세계화는 국권침탈일 뿐이었다. 자동차 운송사업 시작(1911), 시발택시 개발(1955), 최초의 고유모델 포니 개발(1974), 첫 수출(1976) 등으로 국내 자동차의 역사는 이어지지만 도입 당시의 상황은 씁쓸할 뿐이다.
■ 해방 당시 7,146대였던 자동차가 4월말로 1,400만대를 넘어섰다. 이 중 승용차는 4.8명 당 1대 꼴인 1,000만대를 돌파했다. 고종황제 시절로부터 100년 만이다. 1988년 100만대에서 10배 증가하는 데 15년이 걸렸다. 최근엔 연간 100만대씩 급증하고 있어 2013년 이전에 2,000만대를 돌파할 것 같다. 자동차가 늘어나니 교통사고가 많은 게 당연하다 할지 모르지만, 운전문화는 세계화는커녕 여전히 시발택시 수준이다. 시발택시는 1950년대에 미군이 쓰다 버린 지프에 드럼통으로 차체를 붙여 개조한 최초의 국내 자동차다.
/임철순 논설위원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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