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초양도 사는 박말녀(80) 할머니는 펑펑 목을 놓았다고 했다. 17살에 물도 없는 섬으로 시집 와 도선에 개짐을 싣고 삼천포로 빨래 다니던 일, 불덩이 같은 아들을 들쳐 엎고 선착장에서 발을 동동거리던 기억…. 그 설움과 한을 풀었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식수 배 기다릴 일도, 막배 시간 맞추느라 마음 졸일 이유도 없어졌다. 박 할머니 뿐이겠는가. 다리가 섬을 잇고 섬이 육지를 껴안던 날, 다리를 받쳐 든 경남 사천시 동서동의 늑도 초양도 500여 섬민과 남해군 창선면 창선도 7,500여 주민들은 너나없이 속 울음을 울었다고 했다. "오래 살다 봉께 이런 날도 안 있나. 적막강산이 감격시대를 맞은 기라."
다리 개통 이틀째인 지난 달 30일. 섬들은 숨가쁜 자진모리 장단에 휩싸여 있었다. 섬이 생기고, 사람이 꼬여 든 이래 늘 진양조로만 살았을 땅이고, 사람들이다. 그래서 얼떨떨하다고 했다. 이게 발전의 징조이고, 증좌라고도 했다. 경운기 통통배 속도에 맞춰 느긋했을 맥박도 이제는, 경기 서울 등 평생을 두고 처음 보는 번호판을 단, 고속버스며 승용차의 총알 속도에 적응해야 할 터다.
장단의 변화는 섬들을 휘감은 급한 해류처럼 빠르고, 사뭇 위협적이었다. 생체리듬이 적응할 여유도, 그에 대한 배려도 없다. 그 변화를 사람보다 도로가 먼저 감당하고 있었다.
다리와 이어진, 농로나 진배없던, 국도 3호선. 미조에서 발원해 삼천포 진주로 이어진 도로는 밀려드는 관광 차량 행렬에 휘어질 지경이었다. 20여년 간 창선면민들의 생활을 삼천포 뭍으로 이어주던, 이제는 폐쇄된, 도선 선착장 어귀 단항마을에도 승용차와 버스는 쉴 새 없이 드나들고 있었다.
그래도 섬의 질곡을 벗어난 기쁨을 감추지는 못했다. 10개 읍면인 남해군에서 창선면은 본섬의 위성섬이다. 난바다 물이 해류를 타다가 섬과 섬 사이 협로로 쏠리는 속도가 웬만한 목선을 두 동강 낼 정도다. 그래서 본섬을 잇는 창선교가 놓이기 전에는 남해읍 장보는 일에도 목숨을 걸어야 했던 마을이다. 가인리 정용권(53)씨는 "인근 고두리 마을은 한 동네 열 가구 제삿날이 한 날"이라고 했다. 장보러 가던 배가 물살에 엎어진 것이다. 급한 물살과 싸우고, 투박한 땅을 쥐어짜며 이어 온 핏줄이어서 일까. 옛부터 '창선 송장 하나에 읍내 열 사람이 못 당한다'는 말까지 있다고 했다. 지난 해 군체육대회에서도 33개 종목 중 10개 종목을 우승하며, 2위와의 종합점수 격차를 45점이나 두며 우승을 차지했다. 신흥리 양명용(47)씨는 "군민 3만5,000명에 창선면민은 7,400명 아임미꺼. 늙은 힘으로 젊은 읍(1만5,000명)을 눌렀응께 말 다했지요"라며 웃었다.
그래도 창선도는 늑도나 초양도에 대면 사정이 양반이다. 배가 끊겨도 2시간 남짓 돌면 읍을 통해 뭍으로 나갈 길이라도 있지만 각각 100여 가구, 20여 가구가 사는 두 섬은 오후 6시 전후, 정기선이 끊기면 도선을 대절해야 했다. 3㎞, 10분 남짓 거리에 대절료 1만5,000∼2만원. 주낙 연성(200여 개의 바늘이 달린 장구 모양의 어구) 10개를 다듬어야 만질 수 있는 돈이고, 그 일량은 숙달된 젊은이라도 하루 종일 눈알 빠지게 매달려야 가능하다고 했다. "그것도 선장이 잔술이나 걸친 날은 택(턱)도 없고, 이우지(이웃집) 통통배 어선을 빌리 타고 안 나갔나." 늑도 토박이 정인수(48)씨는 "통통배는 힘이 딸리서 해류에 걸리모 한참 밀려가서야 제우 빠져나온다"며 "그것도 목숨을 거는 일"이라고 했다.
말타면 경마잡히고 싶단다고, 답답하고 섭섭한 것도 서말이라고 했다. "이왕 다리 놓는 거 징검다리 섬마다 마을 안까지 쭉 닦아주모 얼매나 좋겄심미꺼. 이 보소, 요는 트럭 아이모 들어가도 몬합미더." 주민들은 '자본'이 없어 식당도 못하지만, 길도 없어서도 못한다고 했다. 관광객은 몰려들고, 급한 마음에 마을 주민들은 서 너 집씩 돈을 모아 다리 위에 난전을 열고 있었다.
시내버스가 다리를 관통하지만 양쪽 영업권 다툼 때문에 삼천포 버스는 창선쪽 다리 끝에서 회차하고 남해군 버스는 삼천포대교 끝에서 회차한다. 그래서 섬 주민들은 삼천포 장까지 1㎞ 이상을 이고지고 걸어야 한다.
도로가 협소한 것도 큰 걱정이다. 벌써 이러니 한려대교(남해-여수)까지 건설되면 군 전체가 몸살을 앓을 것은 불을 보듯 자명한 일. 벌써 차가 무섭다는 말도 들렸다. 지족리 이봉준(74) 할아버지는 "농사 지을라모 경운기로 하루에도 몇 번씩 도로(국도3호선)를 넘어 댕기야 하는데 차들이 줄줄이 쎄리 잡아 내빼삥게 무서바서 못댕기겄다"고 했다.
주민들은 다리 개통이 섬 생활의 편리를 넘어서는, 단군이래 첫 기회로 알고 있었다. 좋은 목이야 외지인들이 벌써 챙겼지만, 땅값도 수월찮이 오른 것도 사실이다. 식포리 마을은 고사리 체험농장을 열 구상으로 분주했고, 가인리는 낚시터 허가를 받아 마을 공동사업을 벌여 볼 참이라고 했다. 국도를 따라 지천으로 열린 갯벌은 종패 뿌려 조개 줍는 갯벌주말농장 사업에 활용하는 방안도 논의 중이었다. 3자(유자 치자 비자)의 섬답게 유자 체험농장을 열겠다는 마을도 생겨나고 있다. 이래 저래 마음이 바쁜데 다리 이름을 두고 삼천포시와 벌이고 있는 지리한 힘겨루기에 속이 터진다고 했다. 관내 이장단과 단체장들의 모임인 창선미래연합 위원장이기도 한 정용권씨는 "구역을 정해 먹을 기 푸진 마을은 먹거리촌으로, 갱치가 좋은 곳은 숙소나 쉼터로 가꿔 놔야 관광객을 붙잡지요. 다리 구경하고 후딱 지나가삐모 우리야 차 똥구멍 냄새배끼 더 맡소?"라고 했다. 이 같은 구상 대다수가 1982년 이래 섬 전체의 개발을 묶어온 수산자원보호구역 족쇄를 벗어야 가능한 일이다.
아직 다리는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남해에서는 창선연육교로, 삼천포에서는 삼천포대교로 부른다. 하지만 소통은, 격렬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소통은 곧 변화다. 주민들에게는, 아직은, 편리와 번영의 동의어로 이해되고 있었다. 삿된 세태에 우려가 없지는 않지만, 일단은 두어 볼 일이다.
/삼천포·남해= 글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사진 정창효기자
■ 변화의 급류속으로
"사돈, 자아(장)∼가요?" "야, 사돈도 자아∼갑니꺼."
삼천포 장날(4일,9일)이면 창선면 32개 마을 주민들은 금남호 첫 배 시간에 맞춰 단항마을로 하나 둘 모였다. 윗동네 새색시 구찌베니(립스틱) 험담에서 아래 뜸 호랭이 할매 중풍얘기까지 면민들의 소리 소문들이 모이고 흩어지던 선착장. 매표소 겸 구멍가게는 문을 닫았고, 금남호 배도 외지로 팔렸다.
주민들에게는 벼락맞을 생각이지만, 뭍과의 격절감에서 오던 섬 마을의 호젓함도 하루가 다르게 옅어질 것이다. 갯바람받이 다랭이논도, 허벌나게 많던 유자밭 마늘밭도 이런 저런 사람장사터로 점차 변할테고, 경운기 섹우(석유) 대주던 길가 기름집들도 주유소로 간판을 바꿔 달 것이다. 이미 단항마을 선착장은 대형 회센터가 들어서 개업도 하기 전에 간판을 내걸었고, 다릿가 언덕 위에는 모텔들의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었다.
창선미래연합 정용권 위원장은 "뭍바람, 돈바람에 휩쓸리지 않고, 우리 속도로 우리 마을을 조금씩 바꿔가야지예"라고 했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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