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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숲 이야기 / 문경 김용사 절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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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숲 이야기 / 문경 김용사 절숲

입력
2003.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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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가는 길. 조선시대 영남 선비들에게 문경새재는 입신양명의 꿈을 한양으로 이어주는 길이었다. 속도에 길들여진 요즘 세대는 험난한 새재 밑을 가로지르는 이화령터널을 지나 문경에 닿는다. 하지만 문경 가는 길은 하늘재를 걸어 넘어야 제 맛이 난다.충주 미륵리에서 출발해 소나무 가로놓인 재를 30분 쯤 걷다 보면 어느새 문경 관음리에 도착한다. 현세불이 사는 미륵리와 미래불이 좌정하는 관음리를 이어주는 하늘재는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통로 역할을 한다.

하늘재를 넘어 도착한 문경. 매년 이곳을 찾아 김용사에 간다. 신라 진평왕 10년(588)에 창건되고 조선 인조 2년(1624)에 중건된 고찰 김용사의 정감어린 절세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는 설선당 온돌방에서의 하룻밤도 그립지만, 그보다는 김용사의 절숲을 보고 싶어서다.

김용사 절숲은 네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주문인 홍화문 앞을 지켜주는 복자기나무, 느티나무, 신갈나무 등 활엽수와 듬직한 전나무가 함께하는 숲이 첫번째요, 김용사 둘레를 반원 형태로 받쳐주는 소나무숲이 두번째다. 왼쪽 숲길따라 솟은 높이 30m미터, 지름 1m에 달하는 전나무숲이 그 세번째. 전나무숲은 화재와 같은 갑작스런 큰일을 대비하기 위하여 조성됐다.

마지막으로 오른쪽 숲길을 따라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잡은 서어나무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숲이 있다. 한 장소에 활엽수 천연림과 잘 가꾼 침엽수 인공림이 함께 있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김용사 절숲이 바로 그런 곳이다.

김용사의 전통 절숲이 일제의 수탈과 해방 이후 60년대까지의 혼란기에도 잘 보전된 가장 큰 이유는 일찍부터 발달된 소유권 때문이었다. 절 입구에 세워진 비석은 그 명백한 증거인데, 비석의 앞면에는 '김용사 소유지', 뒷면에는 광무 6년(1902) 10월에 세워졌다는 기록과 함께 '향탄봉산사패금계'라고 새겨져 있다. 김용사 절숲이 왕실에 숯을 공급하기 위한 용도로 지정된 향탄봉산(香炭封山)이며, 이 곳은 고종이 김용사에 하사한 토지이니 일반인이 함부로 들어가는 것을 금한다는 뜻이다.

일제강점기에 총독부는 산림의 경계와 소유권을 확정하는 임야조사사업 (1917∼1924)을 진행하면서 숲을 일단 국유화한 후 1920년대부터 대부분 공유림(公有林)으로 해체시켰지만 김용사 절숲은 명백한 소유권이 있어 손대지못했던 것이다.

김용사 절숲이 유지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종교성이다. 유서 깊은 절숲은 살아있는 일주문이며 내세로 이어주는 하늘재길 역할을 한다. 이런 이유로 아무리 살기 어려운 시기라도 절숲만은 최후까지 손 댈 수 없다는, 마음 속 깊은 절제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을주민과의 협력을 들 수 있다. 오래 전부터 마을주민들은 김용사 터에서 살아 왔으며, 최근에는 절숲에서 나는 송이를 채취하여 생활에 보태고 있다. 김용사는 얼마전까지 외지인을 포함한 신청자들을 대상으로 송이채취권을 입찰했으나 최근에는 지역민들에만 권리를 주고 있다. 절의 수입 측면에서는 외부의 돈많은 사람들에게 송이채취권을 파는 것이 이득이겠지만 마을주민들의 소득과 앞으로의 절숲 관리까지 함께 고려한다면, 지혜로운 결정을 내린 셈이다.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많은 것을 품고 있는 김용사 절숲. 이 숲에 들면 왜 절과 숲이 온전한 하나인지 알게된다.

/배재수·임업연구원박사 forestory@fo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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