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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광장"보다 좋던 "회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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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광장"보다 좋던 "회색인"

입력
2003.05.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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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인 시위라고나 할까.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아들과 함께 시위를 하고 있었다. <우리를 북으로 돌려보내 달라.> 호소문이 강하게 눈을 파고 들었다. 지난달 24일 오후 광화문 교보문고 정문 앞. 묘한 것은 사내가 아니라, 70세 가량의 신사가 그를 마구 다그치는 풍경이었다."너 그러면 김정일한테 훈장이라도 받을 줄 아냐? 집단수용소 가 임마." 50여 명의 구경꾼에 둘러싸여 신사는 10분 이상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사내는 쏟아지는 막말의 틈틈이 "저는 죽을 각오가 돼 있습니다. 방해 좀 하지 마세요" 라고 방어하고 있었다. 마침내 참견을 하고 말았다. "아저씨, 저 사람 아들도 보고 있는데 너무 모욕을 주는 거 아닙니까? 무슨 얘긴지 들어나 보지요."

이번에는 구경꾼 중 북한 말투의 젊은 사람이 나서 사내를 공격했다. "당신 중국에 와 있는 조선 사람들은 생각이나 하고 그러는 거야?" 사내의 시위는 결국 서점관계자로 보이는 다른 노인이 "경찰서 앞에서나 하라. 종이를 모두 찢어 버리겠다"고 위협하는 바람에 중단됐다. 사회적 통념과 대중정서가 예각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신사의 분노도 이해는 되지만, 비(非)관용적 태도가 너무 차가웠다.

소설 '광장'을 떠올리게 하는 충격이었다. 예전에 최인훈씨에게 "'광장'보다 '회색인'을 더 좋게 읽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의 대표작 '광장'은 아버지를 좇아 월북한 이명준이 주인공이다. 이명준은 한국전쟁으로 유엔군 포로가 된 후 환멸만 남은 남북을 모두 버리고 제3국인 인도로 가던 중 투신자살한다. '회색인' 역시 대학생 독고준을 등장시켜 체제와 이념을 날카롭게 해부한 지식인 소설이다. 남한 방송을 듣고 월남한 후, 다시 모순과 부조리에 절망하는 독고준의 정신적 방황이 아프게 공감되곤 했다.

'회색인'이 더 좋았던 것은 자살로 도피하는 이명준보다, 독고준에게는 회의(懷疑)의 공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짙은 회의에도 불구하고 뿌리를 내리고자 몸부림 치는 고뇌가 더 안도감을 주었다. 사연을 들을 기회를 못 가졌으나, 남한사회에도 정착하지 못한 그 유랑하는 사내의 뿌리 뽑힌 삶이 안쓰러웠다.

'회색인'이 발표된 지 40년, 냉전시대는 갔다지만 냉전적 사고는 집요하게 계속되고 있다. 흑백 대결의 충격을 흡수하는 완충적 색깔이 회색이다. 보다 이성적 사회를 그리며 현실을 회의하고 사유하는 인간이 회색인이다. 회색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는 정신적 불모지대다.

국정원의 고영구 원장과 서동만 기조실장, 정연주 KBS사장 등 진보적 인사들의 임명을 놓고 정국이 경색되고 있다. 이들을 감싸 안으려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 독선적인 면도 있지만, 개혁적 정부라면 과거와 다른 정책을 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과거 '개혁'의 예를 보면 느린 변화는 있을지언정, 그들의 진보성만큼 사회가 급격하게 개혁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친북'으로 억지 분류되는 이들이 모두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임을 결코 의심하고 싶지 않다. 그들은 남쪽 체제가 북보다 우월하다는 점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의 출발은 민족 고통의 큰 뿌리가 분단에 있으므로 분단을 극복해야 한다는 당위에서 시작된다. 이를 위해 약자인 북에 관용을 보일 수밖에 없고, 그것이 친북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회는 아직도 불안정한 위험사회다. 여론조사를 보면 20∼30대의 절반이 '가능하다면 이민을 가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회색인과 관용정신이 많은 사회가 민주사회다. 그 점에서 남은 북보다 단연코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글을 쓰는 이 순간, 창 밖으로 "붉은 짐승 같은 공산당…"이라고 방송하는 '멸공' 차가 지나간다. 요즘 새로 목격되는 구태다. 누가 어쩌려고 시계를 자꾸 되돌리는 것일까.

박 래 부 논설위원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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