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서암 전 조계종 종정이 입적했다. 그의 열반송 아닌 열반송이 긴 여운을 남긴다. 제자들이 열반송을 물었다. "나는 그런 거 없다." 제자들이 졸랐다. "그래도 누가 물으면 뭐라고 할까요?" "정 누가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 대표적 선승의 열반송은 그렇게 인간적이었다. 그럴듯한 한마디로 인생을 정리해 보이고 싶어하는 허세도 없었다. 깃털처럼 가볍게 이승에 머물던 그의 영혼은 떠날 때도 한없이 자유로웠던 듯하다. 인간적 체취가 있을 뿐인 그 열반송이 차라리 육중하다. 그 열반송은 오히려 불교의 본질에 가장 근접했을 듯하다.■ 서암의 입적 무렵 틱낫한 스님이 한국에 왔다. 베트남에서 태어나 출가하고 프랑스에 망명한 후 '플럼 빌리지'라는 명상수련원을 이끄는 불교 지도자다. 시와 강연을 통해 자신의 깨달음을 이방인에게 들려 주었다. <나는 너를 버텨주고 너는 나를 버텨준다 너에게 평화를 주고자 나는 이 세상에 있고 …> 그는 장좌불와(長坐不臥) 수행을 해도 삶에 동료애와 자비, 지혜가 우러나 있지 않다면 잘못된 수행이라고 충고했다. 중요한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니며 '깨어 있음으로 현재의 삶을 충만하게 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나는>
■ 불교는 무(無)의 종교이면서 현세적 종교다. 불교적 체득과 수행 분위기는 동서양에 따라 미묘한 무늬로 변주된다. 서암에게서는 무의 분위기가 짙고, 틱낫한에게서는 현세적 느낌이 강하다. 달마는 동쪽으로 왔지만, 불교는 서양 정신세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서양 철학자 중 불교의 선(禪)을 학문적으로 가장 깊이 천착한 이가 하이데거일 것이다. 이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는 선, 명상 속에서는 지금까지 감춰져 있던 차원이 처음으로 우리 속에서 열린다고 말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드러나는 새롭고 신비한 차원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 서양의 '신과학운동'은 동양적 사유에 관한 그들의 높은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하버드 대학 출신의 현각처럼 벽안 승려들의 한국행 발걸음이 잦아지는 것도 기쁜 일이다. 가람마다 불사가 왕성해지고, 석가탄신일에 즈음해서는 밝고 고운 연등의 행렬이 길다. 그러나 화려해지는 세속적 외양만큼 불교연구나 중생구제가 내실을 이루고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회의적이다. "정토 세상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야"라며 제자의 공부를 격려하던 서암이 그립다. 일체의 허식을 허망하게 여긴 뜻에 따라 그의 사리조차 수습되지 않았다고 한다.
/박래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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