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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르포 / 화성 그 이후

입력
2003.05.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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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파르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지난달 30일 경기 화성시 태안읍을 찾은 기자 앞에 펼쳐진 것은 국철 병점역 개통을 알리는 세리머니였다. 신도시 개발에 이은 전철역 개통은 이곳의 땅값을 몇 년 새 천정부지로 올려놓았다고 했다. 서울 강남 사람들도 가슴을 쓸어 내린다는 평당 3,000만원. 마지막 살인이 벌어진 지 12년. 망각 속에 잠자던 기억을 최근 한 영화가 불러냈고, 그래서 새삼 확인한 것이 마지막 살인도 공소시효가 얼마남지 않았음이다. 그래서 찾은 화성이었다.축제마당을 뒤로하고 역사 바로 뒤편 농수로부터 찾았다. 너른 논 그대로인 채 유독 개발의 시혜가 비껴간 곳. 선을 본 뒤 집으로 가던 박모(25·여)씨는 1986년 10월, 그곳에서 양손이 묶인 채 목 졸려 죽은 나신으로 발견됐다. 형사들이 수법상 연쇄 살인의 시작으로 보는 2차 사건 현장, 5년 악몽의 서막이었다.

"범인은 죽었다?"

어렵사리 10여년간 화성 사건을 전담했던 형사들을 만났다. '화성의 미스터리'가 풀릴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현재의 그들이 궁금해서였다. 연부역강(年富力强)했을 이들은 백발 성성해 퇴직하거나 뒷방에 나앉아 있었고, "패자는 말이 없는 법"이라며 처음엔 손을 내저었다. 꼬박 10년을 화성사건에 매달렸던 A계장은 "한이 많이 쌓였다"며 한숨부터 내쉬었다.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어봤다.

-91년 이후 사건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데.

"범인은 죽었다."

귀를 의심할 정도로 단정적이었다. 근거는 9차 사건 현장에서 나온 흰 머리카락 3가닥. 연쇄로 보이는 사건 현장에서 나온 유일한 범인의 유류물이었다. 이전부터 나이 많은 이를 범인으로 추정하던 A계장은 무릎을 쳤다고 했다. 일가붙이 없이 혼자 살던 건장한 67세 백발 노인이 떠올랐고 급히 차를 몰았다.

하지만 노인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이 노인은 93년 겨울 수원시 근처 빈집에서 무연고 변사체로 발견됐다. A계장은 공동묘지에 묻힌 노인의 시신을 발굴, 9차 사건 현장에서 확보된 범인 유전자와 대조하려 했었다. 하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부터 (당시 기술로) DNA감정이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삽자루를 놓았다"고 했다.

"범인은 시신에 장난을 쳤다. 젊은 사람의 범행으로 보기 어렵다." A계장이 '범인은 노인'이라고 주장한 근거였다. 하지만 지휘부에선 일소에 붙였다고 했다. 9차 사건 직후 현장 인근에서 초등학생 여아 실종신고가 또 있었다. A계장은 "흰머리 할아버지가 데려갔다"는 목격담을 접할 수 있었다. 실종된 여아는 돌아오지 않았고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다. "확인만 한번 했어도 후련할 텐데…어쨌든 그 노인 죽은 뒤에 사건은 없으니…." A계장은 입맛을 다셨다.

1차에서 10차까지 사건 현장을 수습했던 B반장. 그는 6차 희생자 박모(29·여)씨를 생각하면 그때의 감정이 되새김질 돼 지금도 잠을 설친다고 했다. 87년 4월까지 5명의 피해자가 나왔고 나라가 들끓었다. 당시 밤의 태안읍엔 주민보다 잠복 경찰이 많았다. 하지만 범인은 수사본부에서 불과 몇 백m 떨어진 곳에다 남편에게 우산 마중 가던 젊은 주부를 발가벗겨 죽여 놓았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 설마 했던 곳"이었다.

B반장은 "언론 보도를 유심히 지켜보며 경찰을 조롱하는 범인의 시선이 느껴졌다"고 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범인은 88년 9월 엉뚱한 용의자의 체포기사가 언론에 대서특필되자 인근 팔탄면에서 7차 사건을 저질렀다. "너네들 헛다리 짚은거야"라고 말하듯이.

B반장은 조심스레 20대 남자 이야기를 꺼냈다. '손이 부드럽고 작은 키에 날렵한 몸매, 꽤 높은 지능지수의 남자.' B반장은 3년간 그를 주목했다고 한다. 사건이 터지면 그의 집부터 찾았지만 그는 태연했다고 했다. B반장은 10차 사건 직후 처음으로 그를 연행했다. 하지만 혈액형이 9차 사건 현장에서 나온 것(B형)과 달라 곧 내보내야 했다. 사슴 닮은, 선해보이는 그의 눈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뒤 병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교통사고로 그는 시신이 되어 있었다. "'이제 끝났구나'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었다"고 했다.

사건의 저주, 혹은 괴담

지금은 퇴직해 사업체를 운영하는 C반장은 8차 사건을 잊을 수가 없다. 수법이 달라 당시에도 연쇄로 보지 않았지만 그나마 유일하게 범인을 잡은 사건이었다. 현장에 떨어진 음모가 단서였다. 인근 철공소 등을 돌며 820명의 음모를 뽑았다. 화장실로 불러놓고 으름장을 놓고선 한 사람마다 10가닥씩 뽑았다. "눈물을 찔끔 쏟아낸 이들이 처음엔 황당해 하다가 거칠게 항의하기도 해 술 먹여 달래느라 고생했다"고 했다. 결국 음모 성분이 일치한 윤성여(22)씨를 검거했고 그는 현재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복역중이다.

가짜 범인들도 숱하게 만들어졌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죽었다. 9차 사건 당시 연행됐던 30대 목공이 열차에 뛰어들어 죽었고 10차 사건 때도 30대가 투신자살했다. 7차 사건 용의자로 지목됐던 이도 아버지의 무덤가에서 목을 맸다. 이뿐이 아니다.

주요 용의자로 언론에 대서특필됐던 이들은 자살하지 않더라도 90년대 지병 등으로 죽었다. 9차 사건 용의자였던 윤모씨도 최근 간암으로 죽었고 심령술사의 제보로 4,5차 사건 용의자로 낙점 됐던 김모씨도 90년대 중반 지병으로 죽었다.

용의자들의 잇단 죽음은 풀리지 않는 사건 자체에다 '사건에 손댄 형사치고 잘 풀린 이가 없다'는 경찰내의 괴담과 어우러져 '화성 괴담'의 3각축을 이뤘다. 8차 사건 당시 범인의 음모를 뽑아와 특진했던 최모 순경도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C반장은 "사건 현장에서 제사를 지내며 원혼들에게 제발 방법 좀 알려달라고 하소연하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소주병 끼고 짚가리 속에서 겨울을 나던 기억, 전국 교도소를 찾아 재소자를 일일이 확인하던 기억 등을 더듬으며 쓰게 웃었다.

퇴직 후에도 집에다 사건관련 서류를 모셔놓고 있다는 D형사는 기자를 만나 "신이 있어 죽기 전에 소원 하나 들어준다면 '화성사건 범인을 밝혀달라'고 하겠다"며 한동안 목이 멨다.

추억하기 싫은 살인의 추억

"그때 생각하면 안돼. 지금은 여기가 금싸라기 땅이야." 태안읍 사람들은 이구동성이었다. 그때만 해도 몇 번씩 짐을 쌌다가 풀었다는 강모씨는 "몇 년 새 땅부자가 여럿 나왔다"고 했다. 당시만해도 마을 주민들의 상당수가 "징그럽고 소름 끼친다"며 고향을 등졌고, 그래도 끝까지 남은 이들이 지금 보답 받았다고도 했다.

하교길 여중생을 처참한 주검으로 만든 9차 사건의 현장, 병점5리 원바리 고개에도 아파트 기초 공사가 한창이었다. 학교를 파한 여중생들이 삼삼오오 얘기꽃을 피우며 지나간다. '영화'는 알지만 이곳이 그곳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화성을 떠나는 길에 9차 사건 피해자 김모(14)양이 살던 동네를 찾았다. 마을은 개발지구에 묶여 태반의 집들이 부서졌고 주민들은 보상금을 받아 떠났다고 했다. 김양의 부모는 원래 살던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새로 집을 지어 살고 있었다.

집 앞 꽃밭을 갈던 아버지는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건드냐"고 내뱉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12년 여가 지났지만 그때의 생채기는 여전히 시큰해보였다. 희생되지 않았다면 20대의 발랄한 숙녀로 자랐을 딸의 처참했던 마지막 모습을 다시 떠올려 놓은 세상에 아버지는 그때 만큼이나 진저리 났으리라. 범인도 잡아주지 못하면서.

/화성=글 이동훈기자 dhlee@hk.co.kr

사진 원유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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