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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어머니도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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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어머니도 딸이다

입력
2003.05.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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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이 훨씬 넘은 엄마는 책 읽기를 좋아하신다. 책을 읽다가 노트에 옮겨 적기도 한다. 옛날 맞춤법으로 쓴 엄마의 노트를 펴 보면 재미있는 구절도 있고, 눈물 나는 구절도 있다. 외우기 어려운 불경도 적혀 있다.나는 이렇게 나이 먹도록 엄마, 엄마, 큰 소리로 불러대는 버릇없는 딸이다. 그러나 엄마의 읽을 거리가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 쓰는 좋은 일도 하고 있다. 엄마에겐 글씨가 크고 내용이 복잡하지 않은 책이 적당하다. 위인전, 청소년을 위한 세계명작, 종교 이야기, 왕비열전 같은 책을 즐겨 읽으신다.

얼마 전 나는 '나의 어머니'란 책을 엄마 방에 갖다 놓았다. 명사들이 어머니를 회고한 글을 모았는데 한결같이 한 많은 여인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나의 엄마 역시 한이 많다. 술과 정치바람으로 생을 탕진했던 남편, 저 세상으로 먼저 간 아들 등 바람 잘 날 없는 한평생이었다.

내가 엄마를 위해 그 책을 고른 것은 다른 어머니들 역시 힘든 생을 살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였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통해 자신의 아픔을 삭이고 극복한다. 나는 엄마가 그렇게 되기를 빌었다. 드디어 어느날 엄마는 그 책을 읽으며 눈물 흘리고 있었다.

"엄마 왜 울어?" 라고 물으면서 나는 "그 것 봐. 다른 엄마들은 엄마보다 더 가슴 아픈 일생을 살았잖아. 알고 보면 다들 슬픔이 있는 거야" 라고 말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 뜻밖이었다.

"이 글을 읽으니 어머니 생각이 나는 구나."

"어머니? 엄마의 어머니? 외할머니 말이에요?"

나는 놀라서 외쳤다. 외할머니는 엄마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는 한번도 외할머니란 말을 입에 올려본 적이 없다. 그런데 갑자기 외할머니라니, 나는 뒤통수를 한대 맞은 것 같았다. 엄마도 딸이었구나. 다른 사람들이 쓴 어머니 얘기를 읽으며 자기 어머니 생각에 눈물짓는 딸이구나!

나는 엄마가 엄마로 태어났다고 생각했나 보다. 엄마이므로 당연히 가족을 사랑하고, 끝없이 희생하고, 자식들의 불효에도 노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너무나 이기적인 딸이었다. 엄마가 딸이었다는 사실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엄마는 나처럼 엄마의 사랑과 희생을 당당하게 요구하고 그것을 듬뿍 누렸던 딸이었다.

딸은 엄마가 됨으로서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게 되나. 아들은 아버지가 됨으로서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게 되나. 그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몸이 부숴지도록 일한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어리광부릴 수 없다. 자식을 위해 헌신하고 또 헌신하는 것이 부모의 삶이다. 부모는 후퇴할 수 없는 전사(戰士)다.

부모는 자신이 추구해 온 소중한 것들을 가슴 한 편으로 접는다. 그들의 꿈은 자신을 떠나 자식들에게 옮겨 간다. 내 꿈이 무엇이었던가 쓸쓸하게 되돌아보는 순간도 있다. 그러나 부모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오래 쓸쓸해 할 시간이 없다. 그들은 노년에 이르러서야 한평생 밀어뒀던 쓸쓸함에 푹 잠긴다.

엄마의 어머니를 발견한 후 나는 가끔 엄마의 어린시절을 상상해 본다. 외할아버지가 계시던 사랑채 앞마당에 해당화가 피어있는 것을 본 기억이 있는데, 어린시절의 엄마도 그 꽃을 보며 놀았을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일찍 어머니를 잃은 막내딸을 애지중지하셨고, 외숙모들은 툭하면 우는 어린 시누이 때문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 소녀가 엄마가 된 후 걷게 될 힘든 길을 그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가족들이 오늘의 모습만 보지말고 서로의 생을 바라본다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어머니로, 아버지는 아버지로 태어난 게 아니라 딸로 아들로 태어났음을 기억하자. 시어머니도 며느리도 딸이었음을 잊지 말자. 불효를 야속해 하기보다 벌써 부모가 되어 무거운 짐을 지고있는 자녀들의 안쓰러운 모습을 보자… 가정의 달 5월이 왔다.

/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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