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태산이다. 고영구 국정원장 임명을 둘러싼 여야 갈등은, 노무현 대통령이 고 원장에 이어 국회가 불가 판정을 한 서동만 교수를 기조실장에 임명하자 한나라당이 국정원장 사퇴권고안을 제출하는 등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이를 바라보는 심정은 답답하기만 하다. 국정원 개혁의 중요성 만큼이나 상생의 정치를 골자로 한 여야관계, 국회의 권한을 중시하는 방향으로의 입법―행정부 관계 개혁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답답한 것은 국정원 개혁인사가 그렇게 여야간의 극단적인 대립으로 이어져야만 하는가 하는 점이다.
국회가 고 원장과 서 실장에 대해 부정적 판정을 내렸을 때 노 대통령이 여야 총무나 정보위원회 의원들을 만나, 국회의 뜻은 알겠지만 국회의 우려는 오해이며 국정원 개혁을 위해 꼭 필요한 만큼 이들을 임명하는 것을 이해해 달라는 식으로 양해를 구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파국은 피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마디로 노 대통령과 청와대의 정치력의 부재를 보여준 것이다.
궁금한 것은 그동안 대북송금에 대한 특검법 문제 등 여야간의 대치사안에 대해 국회의 의견을 존중하고 여야 총무를 직접 만나는 등 대화와 상생의 정치를 추구해온 노 대통령이 왜 이번에는 대화와 설득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고 일방적으로 인사를 강행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가능성이다.
우선 노 대통령은 국회가 고 원장과 서 실장에 대해 다른 것도 아니고 색깔론을 제기하자 이것만은 참을 수 없어 감정적으로 대응했고,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밀려서는 안된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다.
두 번째 가능성은 단순히 감정적 대응차원을 넘어서 국회의 인사 부적격 판정을 전략적으로 이용하기로 결심했을 가능성이다.
즉 이라크 파병문제로 개혁적 지지세력이 실망해 이탈을 하고 4·24 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해 신당 논의가 일고 있는 상황에서 국정원 개혁인사를 강행해 색깔론을 중심으로 정치적 대치구도를 수구 대 개혁으로 몰고 가기로 결정한 경우이다. 이를 통해 이탈한 지지세력을 다시 결집시키고 한나라당내 보수수구세력과 개혁파간의 갈등을 증폭시켜 정치권이 색깔에 의해 헤쳐 모이는 계기를 만들려고 한 것이다.
이 두 시나리오 중 어느 것이 현실에 가까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그 동기가 어쨌든 현실은 국정원장 사퇴권고안을 둘러싼 한나라당의 내분 등이 보여주듯이 두 번째 시나리오로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목할만한 또 다른 사실은 이번 파국을 통해 뜻밖에도 국정원의 근본적인 개혁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시민단체들은 국정원을 미국의 중앙정보부(CIA)처럼 해외정보수집을 주임무로 하는 해외정보처로 전환할 것을 주장해 왔고 노 대통령도 이를 수용해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바 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집권 후 국정원에 국내정보 수집 기능을 허용하고 수사권도 일정하게 인정하는 방향으로 타협을 했다.
그런데 한나라당이 고 원장과 서 실장이 국정원을 주도하느니 차라리 국정원을 해체해 국내정보 수집과 대공수사는 경찰과 기무사에 이전하고 국정원은 해외정보수집만 하는 해외정보처로 바꾸는 것을 골자로 한 법안의 제출을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홧김에 서방질'인 셈이다.
한나라당이 정말 해외정보처 신설안을 낼 경우 이번 사태 덕분에 오히려 시민단체들이 주장해온 근본적 개혁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개혁은 때로는 엉뚱하고 우연한 계기 덕분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번이 그 같은 사례 중 하나가 될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서강대 정외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