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그막에 그런 일을 겪고 보니, 도입부에서 이야기 했던 1975년의 이른바 '가요 정화 운동' 당시 겪었던 일들이 두서 없이 떠올랐다. 이 모, 황 모씨등 이름만 대면 누구든 알 수 있는 가요 작곡·평론가들이 내 작품에 선을 죽죽 그어 퇴폐니 창법 저속이니, 별의별 이유를 달아 금지곡이라는 딱지를 붙여 대는 바람에 쇠창살 신세를 져야 했던 그 때 말이다. 그들은 심의위원회의 실질 세력으로 군림하면서 생사여탈권의 칼자루를 휘두르고 있었다. '미인'은 '곡이나 가사는 문제 없는데 너무 시끄럽다'며 족쇄를 채우더니, '거짓말이야'나 '아니야'는 발표 2∼3일만에 같은 조치를 내렸던 그들. 그렇듯 음악을 안다는 자들이 음악인을 죽이는 것이 한국 가요계의 가장 큰 문제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그들은 편히 살기 위해 권력의 그늘이 필요했던 것이고, 권력에 붙기 위한 구실로 나를 택했다. 왜? 나는 항상 혼자니. 곡을 쓰면 작곡가들이, 가사를 쓰면 작사가들이, 연주를 하면 연주자들이 나를 걸고 넘어졌다. 그게 반복되다 보니, 독불 또는 '홀'이란 것이 체질로 굳어 버렸다.그런데 내가 새 곡을 발표하면 왜 그리 못 잡아 먹어 안달이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정권에만 붙으면 생존할 수 있다는 점을 간파하고 나를 씹어 댄 것이다. 자신이 사회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를 박살내야 한다는 간단한 원칙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는 치밀어 오르는 증오심에 어쩔 줄 몰랐지만, 나는 그들을 이해하기로 했다. 그 실력으로는 그렇게 해야만 살아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후 당사자들을 가끔 마주치면 인사 정도만 나눌 뿐, 옛일에 대해서는 전혀 내색 하지 않는다.
2000년 작곡한 '가을 나그네'는 그 같은 심정이 가감 없이 표현된 곡이다. 1986년의 작품 '겨울 공원'에서와 같은 황량함이 아니라, 쓸쓸함이라 해도 좋고 달관이라도 해도 좋을 정서가 강하다. '오늘은 어딜 가는가/홀로 가는 길은 어느 것인가/이슬에 몸을 축이네/하얀 안개 어린 백발 스미네.' 이 곡은 이후 무대를 가질 때면 마지막 곡으로 올려, 즐겨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내 식의 노장(老莊)사상이다.
그것이 없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으리라 확신한다. 살인 사건이 벌어졌던 지, 아니면 내가 술에 절어 폐인이 됐을 것이다. 워낙 직선적인 내 성격을 내가 잘 아니 하는 말이다. 금지 이후 집에서 틀어 박혀 하릴없이 지내다 보니, 먼지만 쌓여 있던 전집류에 눈이 갔다. '임어당', '맥아더 자서전' 등을 건성으로 넘기다 눈에 띈 것이 '장자'였다. 그 직전에 '논어'를 펼쳤는데 너무 좋은 말만 나와 눈거풀이 무거워 졌다. 그러나 '장자'는 달랐다. 그 책에 자주 언급된 노자의 '도덕경'도 몇 번 읽고 나니, 나는 무거운 굴레에서 벗어난 느낌이었다. 인생에서 진정 필요한 것은 견뎌낼 수 있는 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노래도 부르게 된 내력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그것은 20대, 신세계 백화점 무대에서 일할 때 송민영 밴드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와 빌 헤일리의 노래 흉내를 내면서 시작됐다. 영어를 모르던 가수들은 한글로 적혀 있는 발음으로 불렀으나, 나는 영어를 알았고 나름대로는 개성적이었다. 그러나 미군 부대에서 일하던 시절에는 전문 여가수들이 있던 터라 연주에만 치중했다.
그러나 가수가 없어 단체를 유지해 나갈 수 없을 때마다 문제였다. 가수 하나 빠지면 나는 물론 나머지 멤버들까지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신세가 돼야만 했던 일이 계속되자, 그룹 엽전 때 마이크를 잡게 된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룹 유지책이었다. 단적으로 말하면 우리나라 TV의 이상한 풍조탓이다. 가수에만 화면을 고정시키다 시피 하는데는 한국뿐이다.
그러나 밴드 당사자들은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연주자, 그것도 리드(lead) 악기의 연주자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안다. 내가 본격적으로 노래까지 부르게 된 것은 재기한 나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한 고육책이었다는 말인데, 가요 프로 PD들이 정작 음악을 너무 몰랐다는 역설적 상황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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