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얼마 전 미국의 대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대선 당시 내걸었던 공약, 특히 북미 관계를 제대로 만들겠다는 약속을 모른 척 한 것처럼 보인다. 노 대통령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압력 때문에 불가피하게 그러한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법조계 출신인 노 대통령이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승인을 받지 못한, 국제법상으로 위법인 전쟁을 지지한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자신의 지지자를 실망시킬 수 있는 역설적 입장에 처한 노 대통령은 당시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이라크 전 참전 및 지지가 국익을 위한 최선의 결정이라고 해명했다.자신이 통치하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대통령이 공약의 일부, 나아가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오히려 그런 행위는 국가 수반의 의무에 속하기도 한다.
흔히 말하는 '실리 정책'이란, 특정 상황에서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있을 때 이를 회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모호한 용어다. 그렇다면 이라크 파병 결정이 실질적으로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카드가 될 수 있을까. 물론 평화적인 해결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보장할 수는 없다. 이라크 전에서 본 것처럼, 미국의 동맹국이었던 프랑스, 독일을 비롯하여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중국, 러시아, 그리고 전쟁에 반대하는 세계 각지의 여론도 미국의 결정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의 파병 결정을 뒤늦게 동의한 국회의 결정 역시 국익을 위한 것이었다고 가정해보자. 이러한 결정을 찬성한 사람들, 특히 이라크 전 파병안을 찬성한 국회의원들은 자신의 찬성표결에 당당한 자부심을 가졌어야 했다. 당연히 이들은 자신의 지지 의사를 당당하게 알렸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오히려 정치권은 시민 단체가 이 문제를 공론화하는 것마저 부담스러워 했다. 왜 한국의 정치인들은 국익을 위한 자신들의 노력을 숨기려고 했을까 ?
의원들의 이러한 반응은 한국의 정계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투명성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 한국의 성숙하지 못한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입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2000년 총선 당시, 시민 연대를 고발하는 과정에서도 이미 성숙되지 않은 민주주의의 단면이 드러났던 것처럼 말이다.
에릭 비데 프랑스인 홍익대 불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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