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로비 사건의 광풍이 6개월째 잦아들지 않고 더욱 거세지던 1999년 11월 14일 남궁진(南宮鎭) 의원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으로부터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호출을 받았다. DJ가 가끔 불러 민심을 듣곤 했기 때문에 남궁 의원은 그 일환으로 생각하고 청와대로 향했다. 그러나 관저로 들어선 그는 수심 가득한 DJ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아니나 다를까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묻던 평소와는 달리, DJ는 곧바로 "청와대에 들어와서 나를 좀 도와줘야 하겠네"라고 말했다. 총선(2000년 4월 13일)을 5개월 앞두고 지역구(경기 광명)에 혼신의 힘을 쏟고 있던 남궁 의원으로서는 부담스러운 제안이었다. 순간 "이번에 당선되면 3선으로 정치적 보폭을 넓힐 수 있는데…"라는 계산이 머리 속을 스쳤다. 그는 일단 "지역 주민들이 비난할까 두렵습니다"라고 즉답을 피했다. DJ는 "잘 생각해보게"라고 당부했다.
남궁 의원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틀을 고민했다. 그리고 DJ 곁에서 보필하기로 결심하고 16일 다시 청와대로 들어갔다. 남궁 의원은 "능력은 없지만 성심껏 심부름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순간 "얼마나 어려웠으면 의원직까지 포기 시키면서 나를 불러 들였을까"라는 생각에 목이 메고 눈물이 흘렀다. DJ 역시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었다. 남궁 의원은 "편하신 대로 시키십시오. 제 생각으로는 비서실장으로는 부족하니 정무수석 정도 맡겨주십시오. 누가 실장이 되든 잘 보필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DJ는 "어느 쪽을 할 지는 내가 좀더 생각해보겠네. 결심을 해주어 정말 감사하네"라고 말했다.
이 장면은 DJ가 옷 로비 사건에 얼마나 시달렸으며 당시 민심 이반을 얼마나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 DJ의 명(命)이라면 개인적 손익을 떠나 따르고 보는 동교동계의 의리도 잘 나타나 있다.
이 때 비서실장을 맡게 된 국민회의 부총재인 한광옥(韓光玉) 의원도 그랬다. 한 부총재는 11월 21일 자신을 찾아온 권노갑(權魯甲) 고문으로부터 "옷 사건으로 대통령이 너무 어려우니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아 돕는 게 어떠냐"는 얘기를 들었다. 한 부총재 역시 의원직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욱이 지역구를 옮겨 구로을 재선거에서 당선된 지 8개월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도 부담스러웠다. 권 고문은 "이것은 내 생각이 아니고 대통령의 뜻"이라고 강권했다. 한 부총재는 확답을 하지 않은 채 다음 날(22일) 청와대로 들어갔다.
한광옥의 증언. "대통령은 국정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비서실장을 맡으라고 간곡하게 말했다. 나는 1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 동안 김빼기를 하려고 했다. 그랬더니 대통령은 '뭐 그럴 것 있는가, 한 시가 급한데 그냥 내일부터 일하고 나중에 지역구민을 설득하라'며 실장 취임을 기정사실화 했다. 그 날이 일요일이었는데 바로 월요일에 발표해버렸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대목은 DJ가 집권 초기 힘을 실어주었던 김중권(金重權) 비서실장을 교체키로 하고 동교동계를 권력의 중심에 포진 시키기로 한 것이다. 누구나 어려워지면 그 어떤 것보다 믿음을 우선시하는 게 인지상정이고, 옷 로비 사건으로 시달린 DJ도 그랬던 것이다.
특히 그 막후 역할을 권 고문에게 맡겼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권 고문은 한 부총재를 설득하기에 앞서 19일 DJ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권 고문은 국면 전환을 위해 청와대 개편이 필요하다고 건의했고, 이미 그 쪽으로 마음을 굳히고 있던 DJ로부터 '한광옥 설득'의 지시를 받았던 것이다. 권력의 추가 신주류에서 구주류로 넘어가고 그 중앙에 김중권 대신 권노갑이 들어 앉는 순간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날 박태준(朴泰俊) 자민련 총재도 주례 독대에서 청와대 비서실의 개편을 건의했다. 전반적인 흐름이 더 이상 김중권 체제로는 한계가 있다는 분위기로 기울고 있었다.
그렇다고 김 대통령이 '김중권 카드'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인간적으로 신뢰감을 갖고 있었고 전략적으로도 총선에서 영남권 교두보를 확보할 카드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 실장이 출마를 위해 사의를 표명하고 DJ가 이를 수용하는 모양새를 갖춰 주었다. DJ는 19일 김 실장과 조찬을 하면서 출마를 권했고 21일 김 실장을 다시 불러 오찬을 함께 하면서 김정길(金正吉) 정무수석, 장성민(張誠珉) 국정상황실장과 함께 신당(민주당)에 합류, 출마하는 것으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당시 언론에는 19일 이후 청와대 개편의 가닥이 잡힌 것으로 보도됐으나, DJ는 이미 남궁진 의원을 청와대로 호출한 14일 이전에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 즈음 동교동계는 온갖 경로를 통해 DJ에게 김 실장 교체를 건의하고 있었고, 옷 로비 사건으로 인한 민심 악화는 동교동계의 논리에 힘을 실어주었다. 권 고문이나 동교동계는 대선에서 승리했는데도 김 실장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불편한 구도를 1년 11개월 만에 깨뜨렸다.
권 고문과 동교동계가 김 실장을 '저격'하려 했던 적은 그 이전에도 있었다. 옷 로비 사건이 커지기 시작한 99년 5월말, 동교동계는 김 실장 등 신주류가 DJ의 입과 귀를 막고 있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5·24 개각에서 당 출신 의원들이 물러나면서 김 실장의 힘이 더 강해지게 된 점, 김태정(金泰政)씨가 법무장관에 발탁된 점이 동교동계를 자극했다. 연일 언론에는 신·구주류의 갈등설, '청와대 언로가 막혔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DJ는 그 때는 김 실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당시 법무비서관이었던 박주선(朴柱宣)씨의 증언. "99년 5월말 김 실장에게 옷 로비 사건을 설명하고 있던 참에 러시아 몽골을 순방 중인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옆에서 다 들렸다. 대통령은 '김태정 장관이 로비를 받아 죄가 될 일을 했나'라고 물었고 김 실장은 '그런 일은 없었다'고 답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이 사람, 저 사람 다 나가라고 하는 것은 나를 무장해제 시키려는 것이다'고 결론을 내렸다."
김중권씨의 부연 설명. "그 때 대통령은 '도대체 신주류는 뭐고, 구주류는 뭐냐'고 언짢은 목소리로 물었다. '신문 용어'라고 답했다. 대통령은 여권 내 갈등, 언론의 공세에 불쾌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대통령의 불쾌감이 드러나지 않도록 박준영(朴晙瑩) 공보수석에게 '공항에 내렸을 때 노 코멘트 하도록 말씀 드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공항 기자회견에서 '언론의 마녀사냥'이라고 일갈하고 말았다. 대통령은 귀국하는 길로 김종필(金鍾泌) 총리, 박태준 총재, 나와 함께 만찬을 했다. 그 자리서 박 총재는 김태정 장관의 교체를 건의했고 김 총리도 은유적 표현으로 교체를 언급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김태정을 변호했다."
DJ는 이런 인식을 했기에 귀국 다음날인 2일 권 고문을 비롯 한화갑(韓和甲) 김옥두(金玉斗) 최재승(崔在昇) 설훈(薛勳) 정동채(鄭東采) 의원을 불러 엄하게 질책했다. DJ는 이 자리에서 "야당이나 언론이 김중권, 김태정을 공격하는 것은 나를 무장해제 시키겠다는 의도다. 거기에 측근들이 편승하니 가슴이 답답하다"고 말했다. 그 이후 6월 7일 동교동 멤버들은 김 실장과 회동, "언론 보도에 개의치 말고 대통령을 잘 모셔달라"며 지원 의사를 밝혔고 이례적으로 최재승 의원이 당사에서 신·구주류의 화합 회동을 발표하는 굴욕까지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화합은 말일뿐 그 앙금은 두고 두고 남았다. 금년 3월초 김중권 전 실장이 동교동 자택으로 퇴임한 DJ를 방문한 자리에서도 이 문제는 다시 거론될 정도였다. 때마침 한 월간지 3월호가 권노갑 전 고문과의 인터뷰를 '김홍일, 김중권의 전횡을 막지 못했다'는 제목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었다. 김 전 실장은 DJ에게 "제목을 보고 너무 놀랬습니다. 누워서 침뱉기라 대꾸하지 않을 생각입니다"라고 말했고 DJ도 불쾌한 표정이었다. 정권이 끝난 뒤까지도 화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동교동계는 김중권을 물러나게 하면서 명실상부하게 권력을 장악하게 됐다. 그러나 똘똘 뭉쳤던 동교동계도 버거운 상대가 없어지자 내부 균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당권, 대권을 놓고 권노갑과 한화갑의 양갑(兩甲) 갈등이 심각해지면서 '권력 앞에는 부모, 자식도 없다'는 속설이 '동교동계는 언제나 하나다'는 그들만의 자부심을 여지없이 깨뜨리게 된다.
/이영성 기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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