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사망 시기와 정황 등이 밝혀지지 않았던 정지용(사진·1902∼?)이 1950년 가을 경기 동두천 소요산에서 미군 비행기의 기관총에 맞아 숨졌다는 증언 자료가 공개된다. 박태상(48) 한국방송대 교수는 5월17일 충북 옥천에서 열리는 세미나에서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북한 시인 박산운의 회고문 '시인 정지용에 대한 생각'을 발표한다. 이 글은 평양에서 발간되는 '통일신보' 1993년 4월24일과 5월1일, 5월7일자 등 3회에 걸쳐 게재된 것으로 조총련계 조선대 김학철 교수가 박 교수에게 제공했다.박산운은 회고문에서 "92년 여름 북한에 살고 있는 정지용의 셋째 아들 구인씨와 함께 소설가 석인해의 집을 찾아가 정지용이 50년 가을 한국전쟁 때 사망한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을 들었다"고 밝혔다. 석인해는 "그 해 9월21일 아침 남쪽에서 문화공작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동두천에서 정지용을 만났다"며 "태백산 줄기를 타는 동쪽으로 길을 잡고 정지용과 함께 오고 있었는데 불시에 미국 놈들의 비행기가 날아왔다. 일행을 발견한 비행기는 곧바로 기수를 숙이더니 로켓 포탄을 쏘고 기총소사를 가했다"고 증언했다. 또 "비행기가 사라진 뒤 정지용을 찾아보니 가슴에 총을 맞고 이미 숨져 있었다"며 "그때 정황이 허락치 않아서 할 수 없이 동무(구인씨)의 아버지 시신을 대충 묻고 통일이 되는 날 친구들과 함께 찾아가 봉분을 만들어 드리자고 했는데 참 안됐소"라고 말했다. 이후 구인씨도 1995년 6월 통일신보에 "아버지가 북으로 오던 중 경기 동두천 소요산 기슭에서 비행기의 기총탄을 맞고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정지용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경기 고양군 녹번동(현재 서울 녹번동) 자택에서 잠시 외출한다며 나간 뒤 행방불명 갖가지 추측과 소문이 무성했다. 국내에서는 그 동안 정지용이 평화교화소에서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계광순 전 의원의 회고가 소개된 바 있다.
한편 최근 발간된 '정지용전집' 개정판(민음사 발행)에는 새로 발굴된 산문 '수수어(愁誰語)―혈거축방(穴居逐放)'이 실렸다.
이 글은 '주간서울' 1948년 11월29일자에 실린 것으로 이북에서 온 일가족이 정지용의 집 앞에 있는 방공호를 파서 거처로 삼으려고 땅을 파냈다가 마을 사람들에 의해 쫓겨나는 과정을 담았다. '수수어'는 정지용 시인이 자신의 일상사와 상념을 녹여 쓴 일련의 짧은 산문에 늘 붙였던 이름이다.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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