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나무'란 말이 있다. 도시의 빌딩숲에 갇힌 아이들의 무지를 꼬집는 말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그렇다면 보리는어디에서 날까'라고 물으면 이런 대답을 듣기 십상이다. '보리수요.'사실 도시의 아이들은 쌀보다 보리를 더 모른다. 여름에 도시를 빠져 나가면 쉽게 논과 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4, 5월에 이삭을 내고 초여름이면 추수가 끝나는 보리를 볼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보리밭으로 간다.
전북 고창군 공음면 선동리 학원농장. 12만여평의 들판을 보리밭 하나로 일궈놓은 흔치 않은 농원이다. 호남평야처럼 훤하게 트인 공간은 아니지만 야트막한 언덕배기마다 보리밭이 있다. 입하(立夏·5월6일)를 전후해 가장 푸르다. 손바닥만한 보리밭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에게는 거대한 보리의 바다가 사뭇 감동적이다. 여름 냄새를 머금은 바람에 이삭이 흔들린다. 푸른 너울이 일렁이는 것 같다.
이곳의 주인인 진영호(56)씨는 1960년대부터 농장을 구상해왔다. 서울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직간접적으로 영농과 조림사업에 관계하다가 1994년 20여년의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관광농원 사업에 몸을 던졌다.
딱 3가지 작물만 한다. 봄부터 여름까지는 푸른 보리밭이다. 보리 수확이 끝나면 콩을 심는다. 가을이면 콩타작 마당이 볼만하다. 화훼도 주요 사업이다. 5,000평이 넘는 유리온실과 묘목장, 각종 과수단지를 조성해 놓았다. 넓은 벌판을 차지하고 있는 단일품종은 남다른 풍광을 연출한다. 그래서 보리가 익는 초여름이면 화가와 사진작가들이 하루에도 수십명씩 찾아오곤 한다.
농원에는 보리밭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언덕 위의 하얀집에서 농장 본관으로 이어지는 사잇길은 산책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마로니에가 우거진 숲길이다. 보리가 익을 무렵이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향기가 가세한다. 아카시아꽃이다. 시원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농장 한쪽에 진씨의 부친인 진의종 전 국무총리를 기리는 백민기념관이 있다.
보리를 주 작물로 선택한 것은 고창의 황토벌에 맞는데다 일손이 많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이 곳의 보리밭은 그냥 씨만 뿌리면 저절로 자라 알곡으로 영근다. 손을 대지 않으니 보리밭 근처에 각종 풀이 자란다. 클로버가 많다. 네잎 클로버 찾기, 꽃반지·꽃시계 만들기….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추억을 전해준다.
보리밭을 감상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비포장이긴 하지만 보리밭 사이사이로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나 있다. 그러나 차를 타고 바라보는 보리밭은 그냥 밋밋한 푸른색일 뿐이다.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걷는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절로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보릿고개(곡식은 떨어졌지만 아직 보리를 수확하기 전의 춘궁기)를 겪었던 어르신들은 지금의 풍성한 생활에 격세지감을 느낄 것이고, 보리 나락을 따먹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부모는 아련한 향수에 잠길 것이다. 아이들은? 그냥 모든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고창에는 고창읍성이 있다. 잘 남아있는 성곽의 하나이다. 조선 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동·서·북쪽의 3개의 문이 있고, 성 안에 있었던 건물들을 재현해 놓았다. 관리상태가 좋아 이 지역 어린이들의 단골 소풍터가 됐다. 숲과 나뭇그늘이 깊어 도시락을 먹기에 안성맞춤이다.
바닷가를 빼놓을 수 없다. 구시포로 간다. 여름이면 피서객들로 붐비는 구시포는 모래갯벌 해변. 무척 넓다. 물이 완전히 빠지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갯벌은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로 이루어져 있다. 아이들이 뛰고, 넘어져도 별로 다치지 않는다.
뛰다가 모랫속에서 무엇인가를 밟으면 손으로 헤쳐본다. '조개의 여왕'으로불리는 백합이 나온다. 크고 묵직하다. 마치 월척을 낚은 듯 행복해진다.
/고창=글·사진 권오현기자 koh@hk.co.kr
가는 길
학원농장을 찾아가는 길은 조금 복잡하다. 곳곳에서 도로 확·포장 공사를 하고 있어 헷갈리기 쉽다. 서해안고속도로 고창 IC에서 빠져 우회전하면 15번 지방도로. 아산면에서 무장면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무장리에서 우회전, 796번 지방도로를 약 4㎞ 달리면 왼쪽으로 계동 버스정류장이 있고 옆에 학원농장이라고 쓰인 돌간판이 보인다. 좌회전해서 조금만 들어가면 보리밭이다.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할 때에는 정읍IC에서 빠져 22, 23번 국도로 고창읍에 들어가거나, 백양사IC로 나와 15번 지방도로를 이용해 고창읍에 닿는 방법이 있다.
묵을 곳
학원농장(063-564-9897)에서 묵을 수 있다. 방이 5개지만 5월초 예약은 거의 끝났으니 서둘러야 된다. 고창에는 숙박시설이 풍족하다. 산새도관광호텔(561-0204), 동방호텔(563-7070), 동백호텔(562-1560) 등이 호텔급 숙소. 동백의 명소인 선운사 입구에 숙박시설이 밀집해 있다. 선운장여관(561-2035) 등이 유명하다. 고창읍에도 장급여관이나 여인숙 등이 많다. 석정온천(564-4441)에서 피로를 씻는다. 흔치 않은 게르마늄온천이다. 온천 주변에 모텔이 몇 곳 있다.
먹거리
농장에서 된장찌개백반, 소고기전골 등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많이 모인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고창에는 '풍천장어'라는 걸출한 먹거리가 있다. 풍천장어란 바닷물과 민물이 어우러지는 곳에서 잡는 장어를 의미한다. 밀물이 강으로 들어올 때 바람과 함께 들어오기 때문에 바다와 맞닿은 민물을 풍천(風川)이라고 한다. 선운사 인근의 인천강이 이러한 풍천으로 유명하다. 만조와 간조 사이에 드러나는 갯벌이 10㎞에 달해 건강하고 육질이 좋은 장어가 난다. 선운사 인근을 비롯해 고창 어디에서나 풍천장어집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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