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지난 주 베이징(北京) 회담에서 핵 문제 등 미국의 우려와 자국의 요구사항을 단계적으로 해소하는 '로드맵'(일정표)을 제시한 것으로 전해져 주목된다. 북한이 제시한 방안에는 북측이 미국으로부터 원하는 모든 것, 미국측에 제공하려는 모든 카드가 포함돼 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이 같은 방안은 이행하는 데 길게는 수년이 소요된다는 점에서 '대범한' 해법이다.지금까지 제각각 제기했던 요구사항들을 한번에 담은 리스트라는 면에서는 새롭지는 않다. 그러나 북한판 로드맵에는 제네바 합의의 결점을 보완하는 내용들이 들어 있다. 과거 핵 의혹에 대한 규명, 미사일 등 핵 이외의 대량살상무기(WMD)에 대한 통제가 그것이다.
따라서 북미가 접점을 찾을 경우 제네바 합의를 발전적으로 승계할 대체협정이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북측의 방도는 당초 알려진 대로 핵 폐기와 체제보장 사이에 얽힌 쟁점을 한번에 일괄 타결하는 방식이 아니라, 미국과 보조를 맞춰가며 단계적으로 풀어나가는 점진적 해법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북한이 구체적으로 시간표까지 제시한 것은 아니지만 순차적으로 무엇을 하겠다고 밝혔다"면서 "요소 마다 새로운 것은 없지만 2∼3년이 걸릴지 모르는 협상의 실마리는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해법은 '단계별 동시행동'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 북미가 상응하는 조치를 조금씩 취하면서 장기적으로 모든 쟁점을 풀어나가자는 것이다.
북한은 우선 미국이 사실상 협상의 전제조건으로 내걸고 있는 핵 포기 문제와 관련, 8,000개 폐연료봉 재처리, 농축우라늄 핵 개발 계획 등 핵 활동을 동결하는 대신, 올들어 중단된 중유공급과 사실상 동결 상태인 경수로 사업을 재개할 것을 미국측에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북한은 대북 체제보장을 위한 준비적 조치도 취해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10월 북한의 농축우라늄 핵 개발 계획 시인 이후 확대 재생산된 위기를 원 상태로 되돌려 놓자는 발상이다.
북한은 1단계 조치가 이뤄지면 핵 사찰을 허용할 뜻을 피력했다. 사찰 주체가 국제원자력기구(IAEA)인지, 미국인지를 명시하지 않았으나, 먼저 투명성을 확보한 뒤 핵 폐기에 동의할 의사를 내비친 것이다. 북한은 1998년에도 미국이 '페리 프로세스(Perry Process)'로 대변되는 관계정상화 방안을 제시하자 금창리 지하 핵 의혹 시설을 미국 관리들에게 공개했다.
북한은 핵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 단계에 진입하면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추진할 뜻도 피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 생각대로라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주변국의 경제지원이 이뤄질 수 있다.
미사일 등 WMD와 관련, 북측은 클린턴 정부 말기처럼 미사일의 실험·수출·제조를 동결하는 대가로 10억 달러 이상을 요구할 공산이 있다.
그러나 북한판 로드맵이 안착할 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미국은 북한이 무조건적으로 먼저 핵을 포기해야지 이에 대한 보상은 없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동준기자 d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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