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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르포 / "러 마피아" 활개치는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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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르포 / "러 마피아" 활개치는 부산

입력
2003.04.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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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부산 서구와 사하구가 만들어내는 감천만에는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역 작업이 중단된 부두에는 먼 거리를 달려온 원양 어선들이 닻을 내린 채 물살에 맞춰 뱃머리를 조금씩 흔들어대고 있었다. 태반이 러시아 어선들. 백·청·적 삼색기는 비에 젖어 후줄근했고, 한국인 부두 노무자들은 비를 피해 선창 위 한켠에 옹기종기 둘러 모여 저마다 가져온 점심 도시락을 내놓고 있었다. 한 노무자가 "요새 들어 검문 많이 하대요"라며 최근 들어 달라진 분위기를 언뜻 내비치자 팀장인 듯한 다른 노무자가 "밥이나 먹어"라며 핀잔을 줬다. '러시아 마피아'들의 국내 진입 통로가 됐다는 그 곳, 전광석화(電光石火) 같은 살인의 한 장면으로 그들의 존재를 고고성으로 알리며 덩달아 주목 받기 시작한 그 곳, 비 내리는 감천항은 여느 항구와 다를 바 없이 고즈넉했다.러 마피아에 대한민국은 살기좋은 나라

감천항 인근에서 수산업자 A씨를 만났다. 부산에 착근한 러시아 마피아의 근저를 얼추 보여줄 가이드 격이었다. 러시아인들과 거래한지 10여년이 됐다고 했다. A씨는 자신의 신상이 조금이라도 알려지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그는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한국 공권력이요? 러시아 애들이 뭐라고 하는 줄 압니까. 대한민국은 참 살기 좋은 나라라고 그래요. 뭐든 자유롭대요. 한마디로 우습게 보고 있어요." A씨는 한국 업자들이 그들에게 잘 못 보였다가는 거래가 끊어지면서 경제적 손실을 입는 것은 물론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노라고 토로했다.

"총 한방이면 끝난다고 합디다. 우리가 못할 것 같냐고 협박하기도 하는데 소름 안끼치겠어요…." A씨가 말하는 '러시아 애들과 그 끄나풀들'의 공공연한 엄포가 단지 엄포만이 아님은 지난 17일 영도구 연선동의 총기 살인이 실감나게 보여줬다. 소음기 달린 두 자루의 권총과 피살자의 급소에 정확하게 박힌 총탄 5발, 그리고 이 모든 것을 10여초 만에 해치우고 사라진 킬러. A씨의 공포는 더욱 견고해졌을 터였다.

부산은 러마피아 생선밀수 전진기지

'생선 도둑질.' A씨가 지목하는 이 모든 사태의 발단이자 장본인 격이었다.

지난해 중반 부산지역 세관과 경찰, 국정원 등에 비상이 떨어졌다. 대규모 생선 밀수 정보를 들고서 러시아 기관원들이 대거 입국, 부산으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러시아 기관원들은 부산에서 며칠간 상주하면서 밀수 생선의 유통 경로를 탐지했다고 한다. 우리측에도 수사 협조를 부탁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들은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부산에 내린 러시아 마피아의 뿌리가 녹록찮음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같은 사실은 외부로는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

사할린, 블라디보스토크, 마가단 등 극동의 항구도시에 거점을 둔 러시아 마피아들의 주 수입원은 이른바 '도둑질한 생선'. 선단을 소유한 마피아들은 러시아 정부가 정한 어획 쿼터 따위는 무시한 채 고기를 잡아올린다. 그리고 수출 관세 한푼 내지 않고 국외로 빼돌린다. 그 배후에는 '마피아들과 사실상 한 몸'이라는 러시아 정보기관 내 인맥이 있음은 물론이다.

러시아 마피아 소유 어선들이 잡아온 '도둑질 고기'가 받아들여지는 곳이 바로 부산이다. 썩은 고기는 파리 떼를 불러 모으는 법. 파리 떼처럼 마피아들이 부산으로 모였다. 최근 4∼5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고 했다.

"킹 크랩 따위 고기는 100을 잡아오면 90이 남습니다. 남들이 10년간 벌 돈을 1년이면 벌 수 있습니다." A씨는 러시아에서 부산으로 들어오는 생선의 50%는 '도둑질 고기'라고 단언했다. A씨는 말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우리 당국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세금만 정상적으로 물면 됐지 러시아가 (단속)할 일을 우리가 나서서 왜 하느냐 카는 기죠."

-우리나라 조직폭력배도 관계하나.

"돈이 꼬이는데 가들이 가만 있겠습니까. 이권이 어느 정돈가 하면요,…선단 가진 마피아 한 놈이 6개월에 500만불 벌어가는 거 봤심다."

윤락녀에서 수산물로 사업변경 확장

부산 동구 초량동에서 만난 또다른 수산업자 B씨의 증언도 일맥상통했다. B씨는 "90년대 초 윤락녀라는 상품을 들고 한국에 진출한 러시아 마피아들이 수산물로 사업품목을 바꿔 이제 본격적인 확장의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부산 영도구의 총격은 그 신호탄이라고 했다.

B씨에 따르면 수산업 이권을 가진 러시아 마피아들에게 부산은 최고의 소비처다. 생선유통에 문제가 없는 데다 러시아 당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수산물 수출 대금의 세탁 창구로서도 손색이 없다. 세계 최고의 선박 수리 기술은 덤이다.

B씨는 "일부 러시아 수산물 무역 대행업체(대리점)의 한국인들과 고려인(재러시아동포)들을 끄나풀과 행동대장 등으로 한 국내 거점이 뿌리깊다"고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B씨의 증언. "러시아 마피아 보스격이 수금하러 한번씩 부산에 옵니다. 관계하는 대리점은 물론이고 그 고기로 먹고사는 업자들이 접대하느라 바짝 긴장합니다. 시내 관광을 따라간 적이 있는데 백화점에서 몇 천만원짜리 시계를 눈 하나 깜짝않고 사는 기라요. 그라고는 '하나 사줄까' 카데요. 그 돈이 전부 밀수 생선 판 돈이라요."

초량동 텍사스촌은 러시아 거리

부산역에서 마주 보이는 외국인 상가. '초량동 텍사스촌'이라 불리는 곳이다. 90년대 초반 러시아 선원들이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고 곧 이어 러시아 윤락녀들이 자리했다. 그리고 지금, 러시아 마피아들의 말초가 자리한 것으로 추측된다. 부산 지역에 외국인으로 등록된 러시아인은 500명, 내왕 인구는 약 1,500명. 그들이 꼭 한번은 거쳐가는 곳이다.

몇 백 미터 남짓한 거리 양편을 러시아어 간판의 카페들과 선불제 휴대폰 대여업소, 가방가게, 전자제품 판매점 따위가 메우고선 한껏 이국적 분위기를 뿜어낸다. 가게를 지키던 한 고려인 종업원에게 마피아 얘기를 꺼내자 빙긋이 웃기만 한다.

거리 뒤로는 그 수를 가늠하기 힘든 모텔과 여관들이 자리했고 러시아 수산업체와 선박회사를 대행하는 한국 대리점들이 러시아어 간판을 내걸고 건물 한 켠을 차지했다.

늦은 밤. 가죽 잠바 차림 러시아인 덩치들이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우르르 몰려다닌다. 감천항에 들어온 어선에서 하선한 선원들이라고 했다. 얼마 전 마피아 보스의 피격사건을 아느냐고 묻자 "러시아에서는 늘 있는 일"이란다. 엄지와 집게 손가락으로 총을 만들어 기자를 향해 쏘는 시늉까지 한다.

무역거래를 위해 러시아 왕래가 잦았다는 C씨는 "러시아 마피아들의 경쟁력은 폭력과 탈세"라고 했다. "기관총과 로켓포까지 동원되는 마피아간 전쟁이 수시로 벌어지는 나라다 보니 총격 살인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고 했다. "경찰은 더 이상 그들의 견제 대상이 되지 못하고 오직 그들 간의 견제가 있을 뿐입니다. 러시아에서 일본, 한국까지 따라와 죽여놓고 가는 것 보십시오. 그것이 그들의 생존 방식입니다."

거래하는 러시아인으로부터 총을 박스째 구해 주겠다는 제의를 받기도 했다는 수산물 무역업자 D씨는 "우리 당국도 러시아로부터 총기 반입을 막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선원들이 감춰서 들여오나.

"그럴 필요도 없다. 고기상자에다 담아 실어내면 아무도 모른다. 미사일도 가져올 수 있다고 한다."

-당국에선 총기 밀반입 건수가 그렇게 많지 않다고 주장하는데.

"한국에서는 '총'하면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아니까 많이 자제하는 것 같더라. 굳이 문제를 일으키면 본 사업에 지장이 있으니까. 하지만 안 들여와서 없지 못 들여와서 없는 것은 아니다."

D씨도 말끝에 러시아 마피아들은 한국 공권력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 당국에서 '지금까지 러시아 애들이 별 문제를 안 일으켰으까'라는 생각에 굳이 건드릴 생각을 안하는지 모르겠지만…그렇다면 오산입니다. 한번 물꼬가 터지면 걷잡을 수 없어요.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조폭 간에 총격전이 곧 벌어질 낍니다."

/부산=글 이동훈 기자 dhlee@hk.co.kr 사진 이성덕기자

■세관·경찰 "모른다" 일관

그 동안 수산업자 등을 상대로 취재한 내용을 들고서 우리측 세관과 경찰 등에 사실 확인을 겸해 문의를 했다. 하지만 우리측 기관의 대답은 짜맞춘 듯 똑 같았다. "잘 모른다. 정보가 없다."

러시아 관세를 물지 않고 들어오는 생선의 유통에 대해서 세관쪽 관계자가 내뱉은 "우리가 그걸 따질 필요가 있느냐"는 대답은 차라리 솔직했다. 이런 논리를 펴는 이도 있었다. "러시아 어장에서의 어획 쿼터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식으로라도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생선이 경제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조금의 부작용은 애국적 견지에서 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나라 제1의 국제무역항. 동북아 허브의 전진기지. 바다 가득 물안개가 피어 오르며 항도 부산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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