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세 여성이 만성설사 때문에 나를 찾아왔다. 언제부터냐고 물어보니 다이어트 식품을 먹으면서부터 계속 설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배가 너무 아파 견딜 수 없다고 했다. 빨리 복용을 중단하라고 권하면서 한번 가져와보라고 했다.며칠 후 환자는 서너가지 병과 봉투를 들고 나타났다. 식사대용의 곡분 가루와 강제로 설사를 하게 하는 하제(下劑)였다. 살을 빼는 방법은 간단했다. 설사를 시켜 탈수시키고, 식사 대신 소량의 곡분 가루를 먹이는 것이었다. 키 160cm에 체중이 58kg인 이 여성의 체질량지수를 조사하니 23이 채 안돼 정상범위였다. 그런데 살을 빼기 위해 무려 120만원 어치의 다이어트 식품을 산 것이었다.
세번째 방문에서 그 여성은 나에게 그 회사를 고발하는데 쓰려고 하니 진단서를 써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판매원에게 남은 것을 환불해달라고 했더니 일단 판매된 것은 특별한 하자가 없으면 환불이 안 된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꼼꼼하게 세상살이를 한다고 자부했는데 자신이 이런 피해자가 될 줄 몰랐다고 하면서, 사회정의를 위해서라도 이 일만은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는 힘이 닿는 데까지 돕겠다고 격려해주고, '설사의 원인으로 다이어트 식품이 강하게 추정된다'는 진단서를 써 주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50대 전후로 느껴지는 남성이 전화를 했다.
"백병원 서홍관 교수님 되십니까?" "맞는데요. 무슨 일이시죠?"
"여기는 ? 식품인데요. 전에 OO씨의 진단서 쓰신 적 있지요? 그런데 이게 뭡니까? 강하게 추정된다니 이런 단어를 써도 됩니까?"
"왜 안되지요? 의사의 입장에서 강하게 추정되었으니까 그렇게 썼지요."
"저는 이런 진단서 처음 봅니다. 이것 책임질 수 있습니까?" 목소리는 거의 협박조로 바뀌었다.
"아, 그럼 의사가 진단서 쓰고 그것에 책임 안질 수 있어요?"
"법정에 서야 할지도 몰라요.""아, 서라면 서야지요. 필요하다면 시간 되는대로 나갈 겁니다."
그제서야 뭔가 심상찮다는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다고 한다.
비만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다이어트와 운동을 통해서 지방을 빼야 한다. 설사를 하게 해 탈수를 시키는 것은 몸만 축낼 뿐 다시 원상복구된다. 나는 법정에서 이런 내용을 증언하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영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차트에 적힌 전화번호로 연락을 했더니 그녀가 하는 말이 그 회사 사람들이 워낙 집요하게 설득하면서 환불해 줄테니 조용히 해달라고 '인간적으로 호소'해 결국 80만원 어치를 환불받고 끝냈다고 했다.
그제야 이런 식품업체가 살아남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힘없는 사람은 부작용에 시달리고도 손해보상은 커녕 환불도 못받고 끝나고, 좀 버티는 사람은 남은 것만이라도 환불받고 그나마 다행이라고 아픔을 달래며 떠나가고, 식품회사들은 또 다른 희생자를 찾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날 오후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서울백병원 가정의학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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