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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그룹 "女비서 3代"/"美처럼 비서출신 女CEO 나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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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그룹 "女비서 3代"/"美처럼 비서출신 女CEO 나와야죠"

입력
2003.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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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기업의 여비서를 '차 대접하고 전화 받는 직업'으로만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빨리 마음을 고쳐먹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비서라는 이름보다 '최고경영자 스태프'(CEO Staff)라는 명칭이 보편화 할 정도로 위상이 높아지고 있으며 비서 출신 여성들이 중역으로 활약하는 기업도 적지 않다. 대성그룹(주) 회장 비서실 수석비서인 전성희(60) 이사는 경력 25년째인 '전문 여비서'의 원조. '전 이사'보다는 '미세스 심'(여기서 '심'은 남편인 서울대 철학과 심재룡 교수의 성)으로 통하는 '국내 최고령 비서'인 전씨가 후배 여비서들과 비서의 세계에 대한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눴다.함께 참석한 여비서 중 중간 언니 격인 유꽃님(42)씨는 대성C& S 대표이사 비서를 10년째 맡고 있다. 또 막내 최소연(25)씨는 고려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지난해 말부터 대성산소 대표이사 비서로 일하고 있는 초년병.

같은 회사에 근무해 서로 얼굴은 알지만 같이 모여 얘기를 나눠본 적이 한번도 없었던, 최고 35년 나이차 '여비서 3대의 대화'는 '미세스 심'의 농담으로 부드럽게 시작됐다.

"제 목소리가 젊잖아요. 전화 목소리만 듣고 저를 젊은 비서라고 짐작했던 사람들이 회사에 방문해서 '아까 전화 받은 비서는 어디 갔나요?'라고 물을 때가 종종 있는데, 그때마다 '그 비서 아가씨는 잠시 외출했는데요'라고 시치미를 뗀답니다."

비서는 회사 내 야당

"모시는 분이 화가 나셨을 땐 어떻게 하세요? 전 공연히 무서워져서 간신히 차 한잔 타드리는 게 고작입니다." 막내 최소연씨가 묻는다.

"모른 척하는 게 제 방법입니다. 다만 더 화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죠." 비서 경력 10년차의 유꽃님씨는 대범한 대처법을 내놓는다.

전씨는 "상황에 따라 대처 방법이 달라요. 정말 화가 나셨을 땐 차를 가져 다 드리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대체로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직원들이 긴장하고 있습니다'라고 솔직히 말씀 드리면 스스로 마음을 가라앉히십니다"라고 말한다. 25년을 같이 호흡을 맞춰온 관록이 묻어나는 해법이다.

김영대 대성그룹 회장과 전씨 남편인 심 교수는 대학동창 사이. 그 인연으로 전씨는 79년 남편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당시 상무이던 김 회장 비서로 입사했다. 그 후 94, 95년 캐나다에 교환교수로 간 남편을 따라 갔을 때를 제외하고는 쭉 김 회장을 보필해왔다. 그래서 김 회장은 종종 전씨를 "제가 모시는 비서입니다"라고 소개한단다.

전씨는 "비서는 최고경영자(CEO)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임원들도 말 못하는 '듣기 싫은 소리'를 CEO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해요. 전 비서는 CEO의 파트너라는 자부심으로 이 일을 해왔습니다"라고 말한다.

내가 탄 커피는 회사의 이미지

"대성그룹 입사 전부터 '경영도 조언할 수 있는 비서 미세스 심'의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서직에 지원했지만, 막상 차 접대를 하는 것은 솔직히 아직까지도 썩 내키지 않습니다"라고 막내 최씨가 털어 놓는다.

전씨는 웃으며 "집에 손님이 왔을 때 주인이 아닌 가정부가 차를 낸다면 대단한 실례"라며 "주인의식을 갖고 내가 탄 차가 우리회사의 이미지라는 생각을 가지라"고 충고한다. 전씨는 방문한 손님의 커피 취향을 일일이 메모해 두었다가, 다시 방문할 때 입맛에 맞는 커피를 내놓으면 어려운 거래도 척척 풀린다고 귀띔한다.

유씨 역시 "차 접대는 비서의 중요 임무 중에 하나"라는 데는 전씨와 같은 생각이지만 자신은 커피를 낼 때 프림과 설탕을 따로 내놓아 방문객이 스스로 맛을 조절하게 한다고 얘기한다.

흔히 여비서의 대표적 임무로 알고 있는 '차 접대'를 놓고 세대간에 미묘한 시각차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비서의 꿈은 HP회장 피오리나

이들 사이에 세대차가 존재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3명 모두 3개 국어에 능통하고 전문 비서로서의 경력을 착실히 쌓고 있지만, 자신의 일과 꿈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를 보인다.

전씨는 "하와이 유태계 보석회사에서 첫 직장생활을 할 때 아버지를 돕던 비서가 사장인 된 아들을 가르치며 일하는 모습을 봐왔기 때문에 36세에 처음 비서생활을 시작할 때도 전혀 망설임이 없었고, 지금까지도 이 일이 즐겁다"며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비서직은 길어야 3∼4년 정도 한 후 이직해 안타깝다"고 말한다. 비서직이란 분명 조역이지만 주연을 돋보이게 하는 중요한 역할이라는 점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유씨는 "여러 분야에서 경험을 쌓은 후 30대 이후에 맡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비서가 전문직으로 자리잡으려면 종합조정능력을 갖춰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짧더라도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후배 최씨에게 "비서직에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지 말고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하라"고 충고한다.

막내 최씨도 "비서는 회사의 전반적 상황을 파악해야 하는 자리라 일을 빨리 배울 수 있지만, 자칫 전문성을 쌓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초조하다"며 "기회가 주어진다면 현장에서 일을 배우고 싶다"고 말한다.

대성그룹 비서 3명의 '일과 꿈'은 서로 달랐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우리나라에서도 미국 휴렛팩커드사의 칼리 피오리나 같은 '비서출신 CEO'가 탄생할 것이라는 믿음은 공유하고 있었다.

/정영오기자young5@hk.c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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