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국회 정보위원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영구씨를 국정원장으로 임명하면서 정보위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과거 국정원이 정권의 시녀 노릇할 때 행세하던 사람이 고 원장에게 색깔을 씌우려 하느냐. 국회는 검증하면 그만이지 임명하라 말라 하는 것은 월권이다"라는 내용이다.노 대통령의 비난은 옳지 않다. 국정원이 '정권의 시녀' 노릇을 할 때 국정원에 있던 사람이 지금 정보위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보위 의견서는 12명의 여야 의원들이 채택한 것이다. 특정인물의 행태에 거부감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정보위 의견서를 그런 식으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
'월권'이란 주장은 더 심각하다. 청문회를 한 후 의견을 내놓는 것이 월권이라면 청문회를 왜 하는가. 주요 공직에 임명될 후보들에 대해서 청문회를 하는 것은 그 후보의 능력과 도덕성을 검증하기 위한 것이고, 검증 결과는 당연히 임명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검증하면 그만이지"란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새 인사청문회법에 의해 국정원장 국세청장 검찰총장 경찰청장 등 이른바 '빅4'에 대한 청문회가 시행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첫 시도에서 대통령이 국회 의견을 월권이라고 몰아붙인 것은 우려할 사태다. 국회 인준이 필요하지 않다고 해서 국회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청문회법의 정신에 어긋난다. 대통령이 임명권을 행사하더라도 충분히 이해를 구하면서 했어야 한다.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의 처사가 '오만의 극치'라고 비난하고, 국회 의견이 구속력을 갖도록 인사청문회법을 개정하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되면 거대 야당이 대통령의 인사권에 개입하여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걱정이 나온다. 그런 걱정에 대해서는 적절한 안전장치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의원들이 청문회에서 "저 사람은 안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는데도 전적으로 대통령의 임명권에 따르라는 것은 무리다.
노 대통령이 국정원장 임명을 강행한 것은 "더 이상 밀리지 않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나왔다. 밀리지 않으려고 파국을 무릅쓰고 강경책을 쓴다는 것은 너무나 구시대적이고 어리석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는 사태가 올 수 있다.
노 대통령은 취임 후 두 달 동안 많은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권위적이지 않고, 여야가 타협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곧 시정하는 자세 등이 그것이다. 대통령의 처신으로는 너무 가볍고, 말 실수가 많고, 불안하다는 등의 결점도 있지만 그가 보여준 탈 권위의 대통령상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제 어느 누구도 과거의 권위적인 대통령상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없다.
그가 이번에 취한 조치는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KBS 사장의 사표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노조 대표들의 의견을 그토록 경청하던 대통령이 국회 정보위의 의견을 '색깔 씌우기'로 일축한 것은 그가 형평성과 유연성을 잃은 게 아닌가라는 우려를 갖게 한다.
노무현 정부의 골격은 과거의 운동권 세력으로 짜여 있다. 군사독재 아래 민주화 투쟁을 하던 사람들이 이제 정권을 이끌어 가는 것은 역사의 순리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국정원은 좀 다르다. '자유주의자들의 동창회'가 열려도 좋은 곳이 있지만 국정원은 적당한 장소가 아니다.
국회 정보위의 여야 의원들이 "사상적 이념적으로 편향성이 강하고 정보업무 경험이 없어 국정원장으로 부적합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면 그런 인물을 피하는 게 옳다. 고영구씨의 전력에 정보위의 판단이 겹쳐진다면 많은 국민이 불안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 그에게 다른 직책을 맡긴다면 시비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굳이 국정원장 임명을 강행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노 대통령은 강경대응으로 얻을 것이 없다. 국민의 불안까지 냉전주의자들의 색깔 시비로 몰아붙여서는 안된다. 파국을 무릅쓰기보다는 국정원장 스스로 사퇴하는 게 낫다. 많은 국민이 색안경을 쓰고 본다면 소신껏 일하기도 어렵고 국정원 개혁도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본사 이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