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과 유행에 민감한 패션 디자이너, 그들은 왜 레스토랑을 만들고 어떤 생각으로 음식에 깊은 관심을 가질까. 돈이 많아서, 혹은 취미가 다양해서, 아니면 멋스러운 걸 좋아해서? 디자이너와 음식. 외견상 별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이지만 미래를 먼저 내다 보고 유행을 리드한다는 점에서 둘은 하나다. 디자이너든 음식이든 잘 나가기 위해서는 높은 안목과 깊은 성찰이 배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또 패션 디자이너들의 음식 디자인 솜씨 자체도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왜 디자이너들은 음식을 만드는가
해외 유학이나 출장이 잦은 업무 특성상 디자이너들은 자연스럽게 음식에 대한 조예를 쌓아간다. 세계 곳곳을 다니며 접하게 되는 다양한 현지 음식이 맛에 대한 '창조적 본능'을 일깨우는 것이다.
국내에 처음 헤어 디자인 개념을 도입했던 그레이스 리. 해외 출장이 많았던 그는 항상 아들 김승용씨와 유명하다는 레스토랑은 모두 찾아 다녔다. 워낙 음식을 좋아했던 터라 보석이나 유명품 쇼핑은 하지않아도 맛있고 이국적인 맛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음식을 직접 하는 것도 좋아해 손님을 대접하다 보니 '그런 솜씨로 개업하는 게 어떠냐'는 농담반 진담반 권유가 많았고 결국 음식 비즈니스에도 뛰어들었다. 헤어 디자인 전문가인 아들 김씨와 며느리도 그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해외유학파 디자이너로 '파크'를 운영중인 박지원씨는 미국 유럽 등지의 한식당을 다니면서 "우리 음식이 맛은 있지만 인테리어나 서비스가 왜 그리도 처지는지 답답했다"며 "우리 문화의 우수성과 창조성을 나타낼 수 있는 레스토랑을 만들어야겠다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다"고 말한다. 그는 "식당은 단지 먹기만 하는 곳이 아니다"며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은 입는 것만큼 크다"고 강조한다.
또 뽄뽀스또를 운영하는 디자이너 강희숙씨. 80년대 일찌감치 청담동에 멋들어진 패션 빌딩을 세우고 커피숍 겸 레스토랑 '테라스 누'를 선보였던 이림씨 등도 해외를 다니며 접한 선진문물이 밑거름이 됐다.
디자이너가 하면 다른가?
옷에 대한 감각이 선구적인 만큼 음식이나 인테리어에 대한 디자인 감각 역시 남다르다.
서울 도산공원 앞에 있는 디자이너 조은숙씨의 카페 '플라스틱.' 1997년 문을 연 이곳 실내에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중앙에 심어져 있다. 천장높이까지 올라간 이 나무는 조명과 어울려 멋진 분위기를 연출한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아이디어.
꽃을 주제로 한 남성복 디자이너 우영미씨의 '카페 알레'도 독특하다. 조경과 꽃에 관심이 많은 그는 '숲속의 작은 길'을 뜻하는 프랑스어 이름에 어울리게 실내 인테리어도 꾸몄다. 카페 한 켠에 플로리스트인 동생 우현미씨가 운영하는 플라워숍이 들어서 있어 전체가 마치 실내가 정원 같은 느낌을 준다. 안영환 실장은 "카페와 플라워숍을 합친 멀티컨셉 숍"이라고 설명한다.
박지원씨의 성을 딴 '파크'는 이름 그대로 '자신만의 공원'을 내세운다. 건축가 민경식씨가 설계, 일반 주택을 개조한 이곳은 1층부터 3층까지 독특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야외에 하얀 천막을 쳐 놓았고 다락방인 3층은 인도풍인데 일본식으로 다다미 방처럼 꾸며져 있다. 2층은 빨간 조명이 빛나고 1층은 거실에 앉아 있는 것 같다.
박씨가 뉴욕 델리 방콕 파리 등 해외를 여행할 때마다 사 모은 물소가죽, 고가구 등의 소품들을 '마치 그녀의 집처럼' 아기자기하게 모아놨다. 어떤 사람은 프랑스식, 누구는 일본식이라고 얘기하는데 막상 박씨는 "박지원의 집에 가보고 싶은 사람이 오는 분위기"라고 말한다.
헤어 디자이너 이상일씨가 운영하는 '모우'는 커다랗고 높은 천장과 고대 로마의 건물터를 연상케 하는 돌기둥이 멋지다. 여행과 꽃을 즐기는 그는 각 나라에서 수집한 이국적 소품과 꽃바구니 등으로 실내를 장식했다. 또 슈슈의 야외 가든, 테라스 누의 야외 테라스 공간 등도 모두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디자이너의 음식 메뉴들
구태여 퓨전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자신들만의 기호와 특성은 메뉴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다.
음식 맛있게 만들기가 특기인 주인의 취향을 반영, 슈슈의 음식맛은 깊고 진하다. 유자가리비, 광어 칼파초, 도다리튀김, 털게와 통영에서 가져온 감성돔 찜, 낫또와 참치의 김말이, 슈슈 너비아니 등 메뉴는 한식과 이탈리아식, 일식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레이스 리는 "음식은 무조건 맛있어야 한다"며 "술집에서 술값을 비싸게 받는 것이 제일 싫어 와인 등을 최대한 싸게 제공한다"고 말한다.
파크의 메뉴 또한 중국, 태국, 일본식의 경계가 없다. 하지만 그저 섞기만 하는 퓨전은 아니다. 입맛 까다로운 박지원씨의 기호대로 재료와 원 메뉴 고유의 맛이 살아 있다. 태국식 해산물과 당면샐러드인 얌운센, 삼겹살과 게를 찐 뿌읍운센, 칠리조개볶음, 생선케이크 등이 맛깔스럽다.
/박원식기자 parky@hk.co.kr
디자이너'스 레스토랑
디자이너가 직접 만들고 경영하는 레스토랑의 효시 격은 그레이스 리가 1982년 개업한 ‘그레이스’. 당시 이탈리아식 레스토랑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레이스 리는 5년전 청담동에 시즌스를 오픈해 운영했으나 지금은가수 싸이의 어머니가 경영중.
이림씨의 ‘테라스 누’도 청담동에서는 원조 레스토랑으로 꼽힌다. 그는1986년 청담동 청담성당 옆에 서양식 디자인이 돋보이는 패션빌딩을 세우고 3층에 ‘테라스 누’를 열었다. 처음엔 커피숍으로 간단한 스낵도 팔았던 이 곳은 레스토랑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전문 ‘바’로 운영되고 있다.
최근의 ‘디자이너 + 레스토랑’ 구도 붐을 이루게한 원조라면 97년 문을연 카페 ‘플라스틱’. 조은숙씨가 ‘커피 파는 이상의 뭔가 있어야 한다’는 믿음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직접 디자인했다. 카페알레, 본뽀스또 등이 뒤를 이었고 최근 슈슈와 파크도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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