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나의 청력(聽力)에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발견했다. 귀에 이상이 생겼냐고? 오해마시라. 생물학적 청력은 지극히 정상이다. 마음의 청력에 이상이 생겼다고나 할까.정색을 하며 이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중1짜리 둘째였다. 시험을 코앞에두고 소설쓰는 동호회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그 애에게 잔소리를 하다가이런 소리를 들은 것이다. “엄마, 제발 내 얘기 좀 들어 줘.” 그러고 보니 나는 귀를 꼭꼭 닫은 채 그 애의 행동이 얼마나 한심한지, 그래서 엄마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만을 일방적으로 떠들어 대고 있었다.
얼마전 한국에 온 틱낫한 스님의 한 강연회에 가서도 나의 청력 문제를 실감했다. 웅얼웅얼 낮은 소리로, 천천히 얘기하는 그의 말에 귀기울이는 일이란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아닌게 아니라 강연이 두시간이 넘어서자 주변 청중들도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며 청력의 한계를 드러냈다. 강연이끝나고 청중들에게 보내는 그의 인사말은 이랬다.
“여러분의 듣기 수행에 감사를 표합니다.”
그렇다. 남의 말을 제대로 듣는다는 건 거의 수행의 문제이다. 한국말의‘듣는다’라는 말은 영어의 히어링(hearing)이나 리스닝(listening)과는차원이 다르다. 아이에게 “너 왜 엄마 말 안 들어!”할 때는 ‘순종’의의미가, “내 얘기 좀 들어줄래?”할 때는 이해의 의미가 깃들어있다. ‘약의 효과를 보았다’는 표현도 한국인들은 ‘약이 잘 듣는다’고 말한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한 보좌관이 그에게 ‘말을 줄이시라’ 조언했다는데 나는 그 말이 ‘남의 말에 좀 더 귀 기울이시라’는 고언처럼 들렸다.
자기 의사 표현하는데만 신경을 곤두세우다보면 남의 말은 자연히 안 들리게 마련이니까.
오보를 둘러싼 정부와 일부 언론의 신경전이 요즘 장난이 아니다. 나는 ‘아’라고 말했는데 너는 ‘어’라고 쓰니 어찌 이럴 수가 있는냐, 너는 ‘아’라고 말했지만 내 귀에는 ‘어’라고 밖에 안 들린다고 연일 시끄러운언쟁을 벌이고 있다. 너무 문제를 단순화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쩐지이것도 우리의 듣기 수행이 부족해 벌어지는 일인 것만 같다.
한국인의 화두중 하나인 영어 실력도 따지고 보면 듣기 문제가 관건이다.
머릿속에서 열심히 작문만 하지말고 상대방의 말에 귀를 열고 들을 것, 새로 정한 나의 수행 목표다.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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