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근(李根) 3자 회담 북한 대표는 회담 첫날인 23일 핵 보유 사실을 공식 회담장이 아닌 비공식 자리를 통해 사전에 짜여진 각본에 따라 전격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AP 통신은 미 소식통을 인용, 리 대표가 미국 대표인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와의 사적인 자리(social gathering)에서 "우리는 핵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실험할지 수출할지 사용할지 여부 등은 미국 태도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첫날 공식회담에서는 북한 핵 프로그램이 검증 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방식으로 폐기돼야 한다는 미국의 기조발제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폐기와 확실한 체제 보장을 요구하는 북한측 기조발제가 각각 개진돼 팽팽한 긴장 기류가 조성됐다. 오전 9시30분 시작된 공식회담은 오후 3시30분에 끝났다. 리 대표가 북한의 핵 보유 사실을 통보한 것은 그 직후였다.
워싱턴포스트는 북한의 통보가 이뤄진 상황을 상세히 묘사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양측 대표가 (회담장 주변) 복도에서 심각한 언쟁을 벌이던 도중 리 대표가 켈리 대표를 한쪽 구석으로 끌고 가 "우리는 핵을 보유하고 있는데 폐기할 수 없다"며 "우리가 (핵무기를) 물리적으로 과시할지 이전시킬지 여부는 미국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이 신문은 "미측 인사들은 리 대표의 발언내용과 진의에 어리둥절했다"며 "리 대표의 발언은 빨랐고 단호했으며 사전에 짜여진 각본에 따른 듯 했다"고 전했다. 양측이 복도에서까지 언쟁을 벌였던 이유는 AP통신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이 통신은 "공식 회담에서 리 대표는 북한이 이미 8,000개의 사용 후 핵 연료봉을 재처리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이 한계선(red line)으로 상정했던 연료봉 재처리를 북한이 스스로 확인해준 만큼 양측 대표들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복도에서까지 언쟁을 벌였던 것 같다.
뉴욕 타임스는 "리 대표의 말은 상당히 모호했다"면서 "직접적으로 핵실험이나 판매, 행동 등을 언급하는 말은 없었다"고 약간 다른 뉘앙스로 보도했다. '실질적인 증명'(physical demonstration)을 할지 '이전'(transfer)할지는 미국의 태도에 달려있다고 한 언급이 핵 실험이나 수출로 확대해석됐다는 얘기도 있다.
결국 북한은 의도적으로 중국이 포함된 3자 공식 회담을 피하고 북미 양자간의 비공식 회동에서 핵 보유를 선언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정황은 지난해 10월 켈리 차관보가 방북했을 당시 북한이 농축 우라늄을 통한 핵 개발을 시인한 뒤 의사전달과정의 문제를 들어 부인하는 태도를 보였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이영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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