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구름과 비(碑) /이병주 지음구한말 이상국가의 실현을 주제로 쓴 이병주(1921∼1992)의 대하소설. 1983년, 1992년에 이어 출판사가 바뀌며 세번째로 출간됐다. 세계 열강이 조선을 두고 각축하고 조정은 부패하여 나라가 백척간두에 서 있던 시절, 천민 출신인 건달 최천중은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조선 팔도의 재주꾼과 인재를 불러 모은다. 무술에 뛰어나거나, 거짓말을 잘하거나, 기운이 세거나, 엄청난 정력을 소유한 이들이 탐관오리를 응징하고 재물을 빼앗아 나눠주는 등 구 체제를 비웃으며 농락하는 이야기가 작가 특유의 문체로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 이 말처럼 이병주는 소설로 한국의 사마천이 되기를 꿈꾸었던 정력적인 작가다. 그의 글은 해박한 지적 편력과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요즘 소설에서 보기 드문 역사의식과 재미를 함께 준다. 들녘 발행 전10권 각권 8,500원.
덜렁이 /김성순 지음
83세의 할머니인 저자가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모았다. 황해도 출신인 할머니는 평양여고보 졸업을 앞두고 부친이 사망하자 중퇴하고 월남, 서울에 정착한 실향민이다. 할머니는 9살 때부터 사용해온 재봉틀과 얽힌 사연, 43년째 서울 한 복판인 오장동에서 살아온 이야기, 오랫동안 키우던 진돗개 '덜렁이'와 얽힌 아련한 추억 등을 담담하게 들려주고 있다. 할머니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3남 1녀를 다 키운 후 칠순을 앞두고 영아시설을 찾아가 사회봉사 활동에도 앞장섰다.
67세의 나이에 영아시설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YWCA상담원으로도 일하던 할머니는 2001년 갑자기 저시력증을 겪는다. 이 책은 할머니가 자신의 이 같은 삶을 딸에게 구술해 완성한 것이다. 사랑을 실천으로 보여준 우리 이웃 보통 할머니의 삶이 잔잔한 감동을 준다. HWB 8,000원.
빈방들 /조은 지음
"나는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남아 있는 내 생명은 덤으로 얻은 것이다. 오직 이 한 생각으로 내 가슴은 터질 듯 벅찼다. 그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설렘과 희망에 젖어 나는 택시에서 내려 집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시인 조은씨가 열림원이 내는 시적인 이야기 '시설(詩說)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으로 선보인 중편소설이다.
먼저 나왔던 윤대녕, 정정희, 한강의 소설보다 아마도 가장 이 시리즈에 걸맞은 작품이 아닐까 싶다. 집안의 기둥이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죽음, 아버지의 파산과 외도, 고모와 오빠의 가출, 엄마의 죽음 등 도저히 회복할 길 없을 것처럼 무너져내린 가정의 한 소녀가 절망 속에서 희망을 싹 틔워나가는 과정을 그렸다. 소녀의 내면이 간결하고 절제된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다. 열림원 8,000원.
/최진환기자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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