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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 - 6·3사태에서 6월항쟁까지]<3>6·3사태(下)-불꽃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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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 - 6·3사태에서 6월항쟁까지]<3>6·3사태(下)-불꽃회 사건

입력
2003.04.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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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년 6월 3일 오후 9시40분 제3공화국 첫 계엄령이 발표됐다. 1시간 40분을 소급하여 오후 8시를 기해 발효됐다. 중앙청 옆 청와대 입구에서 바리케이트 너머로 최루탄이 쏟아진 시각이 오후 8시였다. 다음날 일부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고 나섰지만 반짝시위에 그쳤다. 며칠 후 계엄 당국은 학생데모가 공산주의 세력의 사주를 받았다며 그 근거로 '반국가단체 불꽃회'를 발굴해 발표했다.20일 계엄 당국은 "26일까지 해당 학교에 나가 혐의사실을 해소하지 않으면 제적된다"며 37명의 '혐의자' 명단을 공개했다. 명단에 없는 시위 주동자는 모두 검거됐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7월 6일 정부는 "학생 데모를 공산 세력이 배후에서 조종한 증거문건을 압수하고 도예종(都禮鍾·당시 41세·75년 2차인혁당사건으로 사형)과 김정강(金正剛·서울대 정치학과 3년)을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소요 등의 혐의로 각각 현상금 10만원씩 전국에 수배했다"고 밝혔다. 당시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등 이른바 '데모 3인방'에 대한 현상금이 1만원이었다. 10만원은 간첩 검거 현상금이었다.

7월 18일 내무장관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집결체인 '불꽃회'가 학생 데모를 배후에서 조종했다"며 30여명의 이름을 계보도와 함께 발표했다. 6·3 열기에 찬물을 끼얹은 불꽃회 사건이었다. 김정강(63·한국논단 편집위원)씨의 설명. "불꽃회는 나와 김정남(金正男·61·당시 서울대 정치학과 4년)이 64년 초에 만든 문리대 마르크스주의 연구 서클이었다. 멤버는 5∼6명이었다. 법대 공대 상대 사범대에도 비슷한 조직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름은 각 서클이 스스로 정하기로 했다. 당국에 검거되더라도 '반국가단체'로 뒤집어 씌워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연세대와 고려대, 대구 부산 광주에도 준비되고 있었다. 역량이 갖춰지면 '반제학생동맹'과 같은 전국조직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문리대의 불꽃회가 문제가 된 것이다.

불꽃회란 이름은 레닌이 지하활동을 하면서 만든 '이스크라(불꽃)'라는 잡지에서 따왔다. '한 줄기 불꽃이 러시아 대평원을 태우리라'는 그 책의 구절이 몹시 감동적이었다."

불꽃회 수첩, 혹은 김정강 메모로 알려진 '증거문건'은 한 권의 노트였다. 김씨의 설명. "계엄 후 도피 중 사돈의 팔촌쯤 되는 친척 집에 며칠 묵었다. 갖고 다니던 노트를 그 집 벽장에 숨겼다. 고위 공무원이었던 그분의 집까지 수색을 당했던 것이다. 검거된 후 계속 버티니까 그 노트를 코 앞에 내밀더라. '간첩에 준하는 처우'를 받았다. 불꽃회는 조직적인 반국가단체로 변해 검찰에 넘어갔다. 담당 검사도 '단체가 안 되는데…'하며 '나도 미치겠다'는 말까지 하더라.

불꽃회의 강령과 규약, 메모 등 10페이지 정도를 직접 썼다. 노트를 읽어봤던 사람은 김정남 뿐이었다. 강령에서 당시의 상황을 반(半)식민·반봉건 사회로 규정하고, '박정희 파쇼정권'을 당면한 적으로 삼았다.

조선반도(한반도)를 대표할 정당은 북한의 조선노동당이라고 인정했다. 규약은 조직 운영 방식과 입·탈회 조건 등 4∼5개 내용이었다. 나머지는 활동하면서 가졌던 인식, 선배와 동료들을 만나면서 느꼈던 생각 등을 메모해 놓은 것이었다. 몇몇 선배의 이름도 있었다. 그 중간에 '도예종씨와 모월 모일 모시에 만났다'는 구절이 있었다. 도씨의 이름에 당국은 긴장했던 것 같다. 당시 공안당국은 혁신계였던 도씨를 최대의 반정부 위험인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김정남(전 청와대 교문수석비서관)씨의 설명. "김정강 노트를 읽은 적이 있었다. 강령은 '5·16 쿠데타 세력은 미 제국주의의 직접적인 번견(番犬·집지키는 개)'이라는 표현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모험심이 강했던 김정강씨가 자신의 머리 속에 있던 생각과 구상을 적어 놓은 것이었다. 발표된 연루자도 불꽃회와는 무관했으며, 이른바 계보도라는 것은 당시 학생 시위를 주도하던 친구들의 친소 관계를 설명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노트에 북한 김일성을 인정하고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결국 6·3의 명분을 제압하려는 당국에 그 빌미를 제공하게 됐다."

노트를 보았다는 사실이 인정된 김정남에게는 불고지 혐의가 씌어졌으나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다. 노트 주인인 김정강은 북한에 대한 고무찬양 혐의로 2년 형을 선고 받았다. 나머지 30여명 모두 무혐의로 풀려났다.

결국 '반국가단체'를 조직하려 했다던 불꽃회 사건은 김정강 개인의 생각과 사상을 단죄하는 단독범행으로 마무리 됐다.

정병진 편집위원

● 김정강의 사상편력

그의 사상편력은 이채롭다. 우파에서 좌파로, 김일성주의자에서 마르크시스트로 전이했다. 진홍(眞紅)의 공산주의를 위해 노동자로 변신했다. 그러나 현실의 잣대로 진검(眞劍) 승부를 벌이다 스스로 패배를 인정했다.

교장선생의 아들로 고교를 다니며 육사를 지원했다. 인민군대와 싸우는 호국장성이 되려 했다.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되자 상경해 육사 교장실에 숨어들어가 항의도 하고 사정도 했다. 육사와 가장 비슷한 대학을 찾아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자각이 없는 '즉자적(卽自的) 우파'였다.

모든 정치와 철학이론의 본체에 접근하려면 마르크스주의를 마스터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것은 국가가 금지하는 사상이었다. 헌책방을 뒤져 일본 서적을 구하고, 탐독을 위해 일본어 공부도 했다. '공산당선언'이란 책의 내용은 지금까지 외우고 있다. 신진회(新進會) 정문회(政文會) 등의 서클에서 뜻을 같이하는 선배들을 만났다. '이런 사람들을 따라 다니면 혁명이 되겠구나'하며 감탄했다. 2학년 올라가서 4·19를 맞았다. 그해 11월 민족통일연맹(民統聯) 선언문이 발표되면서 혁신계 단체들이 결성됐다. 당시 리더 그룹 중의 한 사람인 도예종씨를 알게 됐다. 자주 만났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5·16 군사쿠데타 직후 혁신계 인사들에 대한 수배와 검거가 심해졌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민통련의 구호는 곧 나의 좌표였다. K H 나, 셋이 모여 밀항을 논의했다. '워낙 잡으려고 하니 살 수 없다. 일본을 거쳐 북한에 가자. 공작원 훈련을 받아서 내려오자'고 합의했다.

어머니에게 울고불고 사정해서 5만원을 마련했다. 부산에서 함께 배편을 물색하던 중 선주라 칭하는 사람에게 돈을 떼였다. 밀항은 무산됐다. 실망이 컸다. 12월 자원 입대했다.

당국은 나의 입대를 몰랐다. 62년 말 휴가 때 학교에 들렀던 것이 화근을 불렀다. 귀대하고 며칠 후 방첩대에 끌려갔다. '반국가 행위자에 대한 임시조치법' 위반 혐의로 2달간 조사를 받았다. '학생들 사건은 이제 끝났다. 없던 일로 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다.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8개월 복무를 마치고 63년 2학기 때 복학했다.

조직 재건 필요성을 느끼며 강령과 규약(김정강 노트)을 구상했다. 김정남 등과 불꽃회를 조직하다 6·3 직후 검거돼 2년간 감옥에 있었다. 3가지 결론을 얻었다. 첫째, 세계의 잉여자본과 우리의 저임금이 결합해 박정희의 산업화는 성공한다. 그러나 제국주의에 종속될 것이다. 둘째, 김일성은 아니다. 진홍의 마르크스주의를 성공시켜 북한을 해방시켜야겠다. 이는 역설적으로 비전향장기수들과의 대화에서 얻은 것이었다. 셋째는 불꽃회 교훈. 어떠한 것이라도 문자화 해서는 안된다. 무형화하고 암기해야 한다.

출소 후 불꽃회 멤버들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나는 노동계를 맡기로 했다. 66년 12월 영등포 롯데제과에 임부로 들어갔다. 위장취업이었다. 김수복(金壽福)이란 인민적인 이름을 썼다. 임금 받는대로 노동자들 밥 사주고 술 사주며 나의 생각을 주입시켰다. 김수복이 이상하다는 소문이 퍼져 쫓겨났다. 몇 군데를 전전했다. '기능공이 돼야 효과적으로 작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보일러 전기 등 닥치는대로 기술자격증을 땄다. 80년 2월 삼립식품에서 전기주임을 하고 있었다. 사장실로 불려 갔더니 수사관 2명이 있었다. '김정강(자격증 때문에 본명이 알려졌다) 여기 있었구먼'이라 하더라. 노동계와 학원계 좌익 관련자 38명이 검거됐다. 증거가 없어 모두 불기소 되고, 교원조직을 담당했던 권모와 둘이 기소됐다. 북한 고무찬양 혐의로 10개월 선고 받고 복역했다. 모종의 당조직이 있을 것으로 여겼던 당국은 스스로 이를 '무형당(無形黨) 사건'이라고 불렀다.

10개월 복역하면서 전향을 결심했다. 노동계급에 대한 신화가 깨어지고, 신뢰가 무너졌다. 마르크스의 주장과는 달리 노동자는 혁명을 이끌 특이계급이 아니었다. 부르주아와 마찬가지로 욕망 감상 분노를 갖고 있으며, 다만 돈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현실의 공산국가에서 당은 자본도 권한도 갖고 있지 못했다. 다만 1명만을 위해 존재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실천의 문제에 부딪힐 때 불완전함을 드러내 왔다. 이론은 실천을 위한 도구일 뿐 교리가 아니다.

이후 그는 한동안 일손을 놓고 지냈다. 85년 민정당 국책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일하다 88년 통일민주당 공천으로 13대 총선에 나섰으나 턱없이 실패했다. 95년부터 한국논단 편집위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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