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경영컨설팅이나 법률자문, 해외 매각 협상 과정에서 노출된 경영 기밀이 외부로 유출돼 다른 용도로 악용되고 있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독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이뤄져야 할 컨설팅·회계감사·신용평가 등이 다른 업무의 수익창출에 활용되는 이른바 '이해상충'(Conflict of Interest) 논란은 성격상 사실여부가 확인되는 사례는 드물지만, 기업비밀이 악용되는 것을 막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법정관리 신청을 놓고 외국계 투자은행인 골드만 삭스와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는 진로는 골드만삭스가 1997년 말 경영컨설팅 계약 협상과정에서 제공받은 기업 내부자료를 활용해 대규모 채권을 헐값에 매입, 법정관리 신청을 통해 경영 정상화를 방해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진로는 특히 골드만삭스가 당시 맺은 비밀보호협약을 위반하고 있으며, 자산관리공사의 부실채권 공매에 관한 외부 자문을 한 이후 자산관리공사로부터 진로 채권을 헐값에 매입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골드만삭스측은 "비밀보호협약은 2년으로 만료됐으며 경영 컨설팅 부문과 채권 매입 부문은 별도 법인으로 엄격한 내부 차단벽이 있다"며 "경영 컨설팅과 진로 채권매입을 연결시키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라고 반박했다.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러지와 매각협상을 벌였던 하이닉스반도체는 실사 과정에서 경영정보의 대부분을 공개했지만 협상이 결렬된 이후 마이크론은 이 정보를 활용해 하이닉스를 미국 정부에 제소했다. 하이닉스 관계자는 "최근 마이크론의 제소로 미국 상무부가 상계관세를 부과한 것은 '잘못된 만남'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대표적 사례"라고 말했다.
외국계 은행과 외환카드 매각협상을 벌였던 외환은행은 2001년 10월 협상이 결렬된 후 고객 정보 유출과 상품 모방 논란이 일자 지난해 아예 실사 자료를 되돌려 받았다. 외환카드 관계자는 "그 은행이 실사 과정에서 취득한 정보를 영업에 활용했는지 여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당시 노조 등이 나서서 비밀 도용에 따른 소송 불사 움직임까지 있었다"고 전했다.
외환위기 이후 국내 기업의 해외 매각과정에서 협상 결렬로 기업 비밀이 새나간 경우는 더 많다.
쌍용양회가 쌍용정보통신 지분을 모 외국계펀드에 매각키로 양해각서까지 체결했지만 끝내 협상이 무산돼 쌍용정보통신의 군용 전화기 공급현환 등 방산 업체의 영업비밀이 상당부분 새나가 관계 당국에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미국에서도 금융감독 당국이 증권사나 투자은행들의 이 같은 '이해상충' 문제를 막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마련하고 있지만 대형 투자은행들의 고객 회사 우대 관행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글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시장에서 일부 기업이 실제 기업 인수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업계와 기업 정보 탐색을 위해 인수 제안서를 내는 경우도 많은 만큼 산업 비밀을 지키는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국내 기업을 해외에 매각하거나 M& A하는 수준이나 방식은 물론, 제도와 법률이 아직 선진 시장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며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릴 것이 아니라 대등한 관계에서 협상을 하고 법적 제도적으로 요구할 것은 요구하는 당당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호섭기자 dre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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