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지 한가지에만 목을 맬 때는 괴롭다. 박찬호가 유일한 메이저리거일 때 그랬다. 손꼽아 기다리던 박찬호의 호투 여부가 5일 간 국민들의 행복지수를 결정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한국인 빅리거는 5명. 요즘은 매일 '장(場)'이 선다. 이들의 맹활약에 눈과 귀가 바빠진 국내 팬들에게도 골라먹는 재미가 생겼다. 박찬호가 못 던져도 최희섭의 홈런쇼가 기다리고 있고 최희섭이 부진한 날은 김병현의 호투가 국내 팬들의 갈증을 풀어주고 있다. 기대치도 않던 봉중근과 서재응도 심심찮게 승전보를 전해주고 있다.여대생 한송이(22)씨. 최희섭의 팬이라는 한씨는 "야구는 잘 몰라도 최희섭이 뛰는 메이저리그는 재미있다"고 말했다. 메이저리그 붐이다. 직장인들의 점심 밥상에서는 한국인 빅리거의 출전 소식으로 이야기꽃이 피어난다.
메이저리그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영하듯 마니아들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올들어 다음, 네이버 등 포털사이트에는 메이저리그 동호인 모임들이 수십개씩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회원수만 3만 명이 넘는 모임도 적지 않다. 메이저리그를 소재로 한 게임까지 등장, 팬들의 흥미를 사로잡는다. 한국인 빅리거의 소식을 전해주는 스포츠사이트나 정보제공업체들은 늘어나는 매출에 즐거운 표정이다. TV해설을 맡고 있는 메이저리그 전문가들의 인기도 상한가다. MBC ESPN 송재우 해설위원의 경우 최근 팬클럽까지 생겨 달라진 위상을 실감하고 있다.
한국인 빅리거의 활약은 미국에서도 화제다. CNNSI와 ESPN 등 스포츠전문사이트들은 김병현의 첫 선발승 소식을 헤드라인 뉴스로 다뤘다. 시카고 컵스 경기를 중계하는 현지 아나운서들은 최희섭이 컵스의 미국인 팬들도 가장 좋아하는 선수 중 하나라고 소개하고 있다.
교포사회에도 활력소가 되고 있다. 시카고 컵스의 리글리필드에는 교민들의 응원소리가 드높다. 시카고 교민들은 최근 최희섭 후원회까지 결성했다.
한국인 빅리거의 성공스토리에는 뉴욕 양키스의 마쓰이 히데키 같은 스타 출신의 일본인 빅리거들과는 다른 감동이 있다. 최희섭은 4년간 마이너리그 생활끝에 풀타임 메이저리거의 기회를 잡았다. 18일 피츠버그전에서 기록한 서재응의 생애 첫 승은 6년간 음지에서 흘린 땀과 눈물의 산물이었다. 김병현은 잠수함 투수는 메이저리그에서 먹히지 않는다는 통념을 깨뜨리고 있다. 그래서 국내 팬들은 그들의 활약에서 희망을 읽는다.
/김병주기자 bjkim@hk.co.kr
■ 이강철이 본 김병현
지난해까지 마무리로 활약하다 올 시즌 선발전환을 요구한 김병현의 선택은 현재까지는 적중한 것 같다. 나와 같은 잠수함 투수로 선발에서 살아남으려면 투구수를 줄여야 하는데 지금까지 김병현의 투구를 보면 성공적인 등판을 했다고 생각한다.
김병현의 최대 장점은 배짱이 두둑하다는 것. 상대타자와 맞서 절대 도망가는 피칭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마이너스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성급하게 정면승부를 벌이기 보다는 공 1, 2개 정도 유인구를 던져 상대타자를 요리하는 게 훨씬 야구의 맛을 낼 수 있는데 김병현은 그런 점에서 다소 아쉽다. 상대가 노리고 있는 공을 던져, 실점하는 안타까운 상황도 여러 번 봤다. 그러나 선발경험이 쌓이다 보면 자연스레 해소될 것으로 본다. 또 직구위주의 피칭이 많다는 것도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투수는 상대타자와의 기싸움, 눈싸움에서 이겨야 하는데 김병현은 자기 스타일대로 승부를 걸어 낭패를 보는 경우를 많이 봤다. 아쉬운 대목이다. 하지만 올 시즌 10승(방어율도 3점대) 정도는 무난하리라 본다. 애리조나의 원투펀치 랜디 존슨과 커트 실링이 부진을 보여 김병현의 등판이 많아지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승수쌓기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 정민태가 본 박찬호
김병현 최희섭의 활약과 대비돼 요즘 수많은 팬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줘 친한 선배로서 안타깝다. 장점인 스피드를 살려야 하는데 지금은 스피드와 제구력이 모두 난조를 보이고 있다. 공을 던질 때 예년보다 공을 놓는 스로잉 동작이 짧아졌다. 공이 빠르면 타자들의 손이 빨리 나가게 돼 있다. 빠른 볼이 있어야 변화구도 살기 마련이다.
너무 변화구만 집중 연습한 흔적이 보인다. 내 경우를 봐도 변화구 연습을 많이 하면 자연스레 직구 스피드가 떨어진다. 그래서 나는 연습피칭을 할 때도 100% 전력투구한다. 그래야 스피드 유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워낙 자기관리가 철저한 후배라 몸관리나 마음가짐이 해이해졌다고는 믿지 않는다. 나이를 봐도 아직 내리막길에 접어들 때는 더더욱 아니다.
물론 체인지업과 변화구는 훨씬 좋아졌다. 올시즌 선발로테이션에 빠짐없이 들어가고 현재의 컨디션과 구속(144∼148㎞)을 유지할 경우 일단 10승 이상은 가능할 것 같다. 방어율은 4점대. 다만 스피드가 향상되면 15승 정도 예상되지만 제1선발로서 해줘야 할 20승은 어렵다. 찬호가 특유의 패기를 다시 찾고 자신감 있게 던지길 기원하고 있다.
■ 이승엽이 본 최희섭
나이로 보면 3살 아래 후배지만 실력면에선 전혀 후배같지 않다. 오히려 선배같다는 생각도 든다. 좌타자겸 1루수로 같은 포지션이라 더욱 친밀감을 느낀다. 공을 끝까지 보고 때리는 침착성, 스윙폼, 1루수비 등 흠잡을 데가 없다. 그중에서도 볼넷을 골라내는 선구안이 특히 돋보인다. 올 시즌엔 적어도 30홈런 3할타율을 기록할 것으로 믿는다.
일본인 거포 마쓰이 히데키보다 힘과 정교함에서 앞선다고 생각한다. 다만 슬럼프에 빠졌을 때 어떻게 헤쳐나오느냐가 앞으로의 과제다. 한가지 아쉬운 점을 꼽는다면 타격자세를 교정했음에도 여전히 스윙폭이 크다는 것이다. 스윙폼이 크면 장타로 연결 될 수 있는 반면 삼진도 많이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메이저리그 초년병이지만 세계 최고의 야구선수들 틈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는 배짱도 보기 좋다. 모든 면에서 본받을 만 하다.
메이저리그 신인왕도 현 추세라면 최희섭의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년에 메이저리그 진출을 생각하고 있는 나로서는 최희섭의 분발이 많은 자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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