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는 종이하고 연필을 들고 다니면서 나에게 한글을 가르쳐 달라고 한다. 아이를 잘 키워 보겠다거나 좋은 엄마가 돼 보겠다거나 하는 열성도 사그러들고 걱정도 느슨해져서 6살이 넘도록 가르칠 생각을 안 했지만 제 형이 숙제를 하는 저녁이면 내게 와서 글씨를 가르쳐달라고 조르고 또 조르는 것이다. 그 애가 그럴 때마다 나는 당황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한글을 가르치는 법을 모른다. 왜냐하면 한글을 배워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나는 글을 배운 일이 없다. 아무리 기억해도 나는 어느 순간 그냥 읽고 있었다. 그 전에 그러니까 세 살 무렵, 초등학교 일학년이던 오빠의 책가방을 몰래 뒤져 지금의 막내처럼 연필을 쥐고 쉬워 보이는 글씨, 그러니까 '이'라든가 '가'라든가 '는' 같은 글씨를 쓰며 놀았다는 것만이 기억의 전부이다. 그때 우리집에서는 소년한국일보를 구독하고 있었다. 지금은 제목을 기억할 수 없지만 거기에는 이원복 선생의 만화가 연재되고 있었다. 누구보다 일찍 일어난 내가 궁금한 만화 내용을 먼저 읽고 아침 밥상머리에서 형제들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래서 그 애가 오늘 엄마를 만났어. 그래서 말하지. 이렇고 이렇다고 말이야." 거짓말! 첫 반응은 그랬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 만화를 다 읽고 있었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들의 의심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몰랐다. 나중에 신문을 보고 연재만화의 내용이 틀리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 식구들은 다른 책을 갖다가 내 앞에 들이댔다. 읽는다는 것이 무어 그리 대단한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언니의 중학교 국어 교과서를 읽어냈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흐른 후 나는 가끔 생각하곤 했다. 나는 왜 하필이면 글씨를 쓰며 놀았을까. 오빠가 제 책가방을 뒤지면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면서, 때로는 머리까지 쥐어 박힐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 친구가 없었던 것도 장난감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하필 왜 글씨를 쓰며 놀았을까.
칠 년쯤 전 겨울날 나는 마포에 있는 한 출판사를 향해 차를 몰고 가고 있었다. 일찍이 문자를 알아 조숙하기만 했던 아이는 소설가가 돼 있었다. 고속도로에 접어들 때 내리기 시작한 눈발이 강변도로에 들어서자 폭설로 변해 있었다. 차를 되돌려 집으로 돌아가기에도 너무 늦어버린 걸 알았기 때문에 나는 그냥 앞으로 가고 있었다. 여기저기 눈길에 미끄러진 차들이 강변도로 한쪽에 구겨진 휴지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그래도 운전에 꽤 능숙하다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기어를 낮추고 앞 차와의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앞으로 달려가던 승합차 한대가 갑자기 균형을 잃고 미끄러지더니 한 바퀴 돌아 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눈길에서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브레이크를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에 나는 승합차 운전사를 바라보았다. 우습게도 나와 부딪히지 않기 위해 브레이크를 밟아대다가 그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승합차 운전사와 내 눈이 멀리서 마주쳤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이것은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나는 오히려 편안히 브레이크에서 발을 풀고 상황이 나를 대체 어디로 끌고 가려는지 멍하니 보고 있었다. 한때 나는 이 강변도로를 운전하고 갈 때마다 죽고 싶어, 죽고 싶어 하고 되뇌었지 하는 기억도 떠올랐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이렇게…, 사실은 별로 죽을 마음도 없는 이 순간에 저 거대한 승합차는 나를 덮치는구나…. 하필 그날이 내 생일이라는 것이 머리를 스쳐가자 언뜻 웃음이 나왔다. 이 모든 것이 불과 2,3초 사이의 일이었다.
다행이었다. 그 승합차는 내 차를 5㎝쯤의 간격으로 스쳐 지나가 중앙 분리대를 들이받고 멈추었고 내 차는 그 곁을 지나쳐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앞으로 가고 있었다. 그 천만 다행인 순간에 내가 나를 위해서 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난 한 해 나는 가족과 함께 독일 베를린에 있었다. 우리가 살던 집 주변에는 숲이 울창했고 봄이 오자 진분홍 마로니에 꽃이 우리집 유리창과 온길을 뒤덮어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건 그저 의례적으로 사람들에게 써보내는 편지의 구절로서나 좋았을 뿐, 나는 몹시 지쳐있었다. 나는 네 가족의 살림을 오로지 혼자서 책임지고 있었다. 내가 가장 못하는 것이 바로 그건데, 김치에서부터 국수까지 내 손이 아니면 먹을 수 없는 상황, 김치와 된장국이 없으면 밥을 잘 먹지 못하는 나 자신이 우선 가장 큰 문제였다. 친구들에게 가끔 전화가 오면 나는 농담을 하곤 했다. "독일로 왔느냐고? 아니, 서재에서 부엌으로 왔어."
남편과 아직 어린 아이와 도시락까지 싸가야 하는 큰 애 때문에 부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나는 혼자서 밥을 하다가 창문을 내다보며 가만히 생각해 보곤 했다. 책 한 권 못 읽은 지 벌써 몇일이구나. 책을 안 읽고 지낸 지 한달이구나. 그리고 몇 달이 흐른 후 나는 깨달았다. 석 달째 글 한 줄 읽지도 쓰지도 못했구나, 맙소사!
가장 먼저 다가온 느낌은 그래도 살 수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세 살 때 혼자서 오빠의 책을 베껴 쓴 이래 아마 거의 사십년 만에 글씨 한 줄 없이 석 달을 산 것이다. 글 없어도 나는 살아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잘!
소설가가 된 지 십오 년쯤의 세월이 흘렀다. 처음 몇 년 동안 나는 이런 질문에 주저 없이 대답하곤 했다. "왜 글을 쓰냐구요? 왜냐하면요, 그건 오직 그때만이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지요! 글을 쓰는 순간만큼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때는 없거든요."내가 하도 자신만만하게 대답을 해서 질문한 사람들이 오히려 머쓱했다는 뒷이야기. 그리고 지금 귀국을 하고, 이사를 하고, 독일에서 온 짐과 한국에 남아 있던 짐을 정리하다 말고 몸살로 앓아 누워서 전화를 받았다. 글을 좀 써 주시겠어요?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하는 거 말이에요.
나는 아직도 내가 평생 글을 쓰며 살지 자신하지 못한다. 가끔 친구들에게 "나 글 쓰는 거 때려치우고 국수집 할까 봐, 나 김치국수 맛있게 비비잖아"하면 친구들은 이제는 아예 대꾸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 따르면 글 쓰는 것은 나의 운명이라는 거다. 운명…운명 말이다. 그럴까 하고 나는 우물거린다. 직업적 소명이라는 말의 라틴어 어원은 부른다는 동사에 어원을 두고 있다. 글을 쓰는 것이 나의 소명이고 운명이라면 누가 나를 불렀는지 나는 모른다. 아마도 신이, 아마도 어릴 때부터 예민하고 조숙했던, 그래서 남들 다 괜찮다는 상황에서도 혼자 괜찮지 않았던 유전자가 불러서? 그도 아니면 어떤 상황에서도 거짓말은 할 수 없는 치매증세 때문에 다른 직업은 아예 꿈도 꿀 수 없어서? 의례적 인터뷰라도 하고 오는 날이면 집에 와서 기절한 듯 서너 시간은 자다가 깨어나고 낯선 이들과 점심을 먹으면 어김없이 체해 며칠을 고생하는 특이체질이기 때문에?
나는 지금 새 집에 앉아 있다. 서재도 정리되고 스탠드도 따뜻하다. 식구들은 모두 학교로 떠났다. 나는 누구인가. 그렇지, 이런 시간에 결국 나는 이런 질문을 하고 만다. 아직 내 손길을 필요로 하는 토끼 같은 자식들과 여우 같은 남편에 둘러 쌓여 있으면서 저 타인들이 다 제 갈 길로 떠나도 남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설가가 되고 나서도 처음으로, 일기장에 그렇게 썼다. '나는 작가 공지영이다. 그래서 고맙다, 지영아'라고.
● 연보
1963년 서울 출생
1985년 연세대 영문과 졸업
1988년 계간 '창작과 비평'에 단편 '동트는 새벽' 발표 등단
소설집 '인간에 대한 예의'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장편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운 시작'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고등어' '착한 여자' '봉순이 언니' 등
21세기문학상(2001) 한국문학작가상(2001)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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