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환경/"환경운동연합 10주년" 좌담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환경/"환경운동연합 10주년" 좌담

입력
2003.04.24 00:00
0 0

환경운동연합이 4월로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우리나라에 환경이라는 테마를 처음으로 소개하고 이에 천착해온 환경연합의 지난 10년은 국내 환경운동의 역사와 다름없다. 창립 때부터 활동가로 참가해온 김혜정 환경연합 공익법률센터 사무처장, 교수 그룹으로 활동해온 이시재 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 환경연합 바깥에서 이를 지켜봐온 홍성태 상지대 교양과 교수로부터 환경연합의 활동 성과와 한계, 그리고 앞으로 전망을 들어본다.대중성 확보라는 열매

홍 교수= 환경연합의 지난 10년간 활동을 돌아보면, 국내 환경운동이 양적으로나 시민의 관심도로나 상당한 발전을 이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발전이 정치적 성공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환경연합이 환경문제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했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겁니다.

김 처장= 1980년대 후반만해도 '대중성'을 생각한 운동단체는 거의 없었지만, 우리는 시민이 쉽게 찾는 단체여야 한다는 의식이 분명했어요. 일례로, 당시 운동단체 활동가들은 대개 오후가 돼서야 출근했지만 저희들은 오전 9시 출근을 꼭 지키도록 했죠. 시민들이 전화를 했을 때 받지 못하면 신뢰를 잃는다는 뜻이었어요. 일반 직장처럼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저희는 그것이 시민들로부터 신뢰 받는 조직을 만드는 작은 밑거름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또 당시에 활동가들이 공부하러 유학이나 대학원에 간다고 하면, "싸움 하기도 바쁜데 무슨 공부냐"며 코방귀를 뀌던 시절이었지만 환경운동은 전문성이 뒷받침 돼야 한다는 생각에 이를 적극 권장했습니다. 시민단체 최초로 민간연구소도 만들었고요.

이 교수= 환경연합이 94년쯤부터 길거리로 나서서 회원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던 것은 시민운동의 방향 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죠. 활동가들도 공개채용을 하면서 폐쇄적인 틀 속에 갇혀 있던 운동단체가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문을 열고 일반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던 거죠. 또 이 무렵 김영삼 정권도 시민운동을 대화의 파트너로 삼기 시작해 시민운동의 사회적 공간이 제도적으로 형성되어 갔습니다. 환경운동의 경우는 91년 낙동강 페놀 오염 사고를 계기로 환경에 대한 관심이 비약적으로 높아졌고, 환경연합이 이런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큰 성과를 남겼던거죠.

환경정치의 실패

홍 교수= 하지만 그 성과가 정치적 영향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환경연합의 경우, 회원수가 8만명으로 시민단체중 가장 많고 조직도 방대하지만, 정치적 영향력 면에서는 주변에 머물러 있어요. 환경문제가 대부분 국책사업과의 갈등으로 인한 것이지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정치적 힘, 즉 환경정치의 수준은 미미한 것입니다. 새만금 문제만 해도 수년째 해결을 못하고 있잖아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육신은 죽었지만 그가 남긴 유산이 여전히 우리 사회 깊숙히 뿌리 박혀 있기 때문일 겁니다. 중앙집권적 성장 제일주의,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폭력적 수단, 그리고 그 결과로 국토와 자연이 훼손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심성이 한국 사회체제의 기반에 깔려 있는 거죠. 환경운동이 이런 사회 구조 자체를 바꾸는 데는 아직 역부족인 상황입니다.

이 교수= 환경연합이 조직에 비해 정치적 힘이 미약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환경연합이 지난 10년간 도달해왔던 지점이 생태주의입니다. 이는 현재의 룰로 평가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가치입니다. 다른 시민운동은 현재의 룰 아래서 그 룰을 제대로 지키느냐를 갖고 싸우면 되지만, 환경운동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가치지향적 운동인 겁니다. 그 질서가 아직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힘든 거죠.

김 처장= 발전노조 파업의 경우를 보면, 노조는 공기업의 사기업화 반대에만 주력해요. 이를 통해 노동운동은 공공성의 문제를 제기하지만,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공기업이 가장 환경파괴를 많이 일삼은 집단입니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전력산업 자체가 환경친화적으로 개편돼야한다는 점을 지적하지만 그 부분까지 나가는 게 힘듭니다. 환경문제로 공동조사단을 만들 때도 어려움이 많아요. 학자들이 우리 일을 하게 되면 앞으로 정부 프로젝트를 못 맡게 된다며 참가를 꺼립니다. 경제분야 시민운동의 경우는 시민운동 활동이 자신의 연구 업적에도 연결돼 있지만 환경분야는 그렇지 못해요. 대단히 진보적이라는 지식인도 환경문제 만큼은 기존의 개발세력과 다를 바 없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환경문제는 환경단체가 알아서 하겠지라며 나몰라라 하는 태도도 비일비재합니다.

홍 교수= 노조가 제기하는 공공성은 사실 국가주의적 성격이 강합니다. 정부가 댐을 짓고, 핵발전소를 지을 때 국가적 과제라는 논리를 들고 나오는데 노동운동 역시 이런 국가적 대안에 사로잡혀 있는 거죠.

여전한 생태적 비민주 정부

김 처장= 노무현 정부 역시 개혁과 변화를 이야기하지만 개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환경철학이나 환경정책의 방향이 있는 것도 아닌데다, 인수위 때도 그랬지만 청와대 수석 중 환경 분야 전문가가 전혀 없습니다. 환경문제에 대한 국민의 열망은 높아졌지만, 정부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합니다. 새만금 공사, 핵발전 등 10년 전에 제기됐던 문제가 똑 같은 방식으로 되풀이되고 있어요. 환경이 빠진 개혁이 어떻게 진정한 개혁이 될 수 있겠습니까.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조정회의 첫번째 의제가 상수원보호구역의 규제완화, 경유승용차 허용 등 환경규제 완화였습니다. 정치적 민주화일지는 몰라도, 생태적으로는 반(反)민주화인 것입니다.

홍 교수= 박정희 체제 아래서 우리는 능력에 넘치게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뤘습니다. 이런 좁은 나라에서 GDP가 세계 11위라는 것은 놀라운 성장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중의 착취가 있었습니다. 인간개발지수, 여성개발지수 등은 형편없는 거죠. 환경지속성지수는 한국이 세계 136위이고, 환경을 고려한 서울의 삶의 질은 세계 157위예요. 이런 지표들이 보여주는 것은 경제력과 삶의 질 사이에 심각한 모순이 있다는 겁니다. 엄청난 경제력을 환경개선에 사용해야 하지만, 여전히 환경착취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현 정부도 이 낡은 체제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태주의의 확산 과제

이 교수= 환경운동이 우리 사회의 근본체제, 그 패러다임을 바꾸는 운동이지만 좁은 분야에 국한된 부분 운동으로 치부되고 있어요. 우리 문명의 생태적 전환이 우리 사회 전부분에 걸쳐 있다는 점을 어떻게 이해시키느냐가 앞으로 중요한 과제일 겁니다. 환경연합이 단지 환경문제만을 가지고 발언할 것이 아니라 경제 여성 민주화 인권 노동 등 여러 문제에도 생태적 가치가 결부돼 있다는 점을 알려야 합니다. 환경운동의 전선을 확대하고, 여타 사회운동과 결합하면서 녹색정치의 외연을 확대시켜 나가야하는 거죠.

홍 교수= 미국의 환경단체인 시에라클럽의 경우 본부가 샌프란시스코에 있지만, 가장 많은 활동을 하는 곳이 워싱턴 지부입니다. 의원들의 동향이나 각종 입법안을 분석해서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겁니다. 잘못된 법안이 상정될 조짐이 보이면 50만 회원들에게 알려서 의원들에게 항의전화와 편지를 보냅니다. 우리도 이런 입법투쟁을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김 처장= 우리 시민사회의 내셔널리즘을 극복하는 것도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환경문제야말로 국경을 초월한 것인 만큼 내셔널리즘을 극복한 국제 운동을 전개하는데 환경운동이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리=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 환경연합 발자취

환경운동연합의 모태는 1982년 5월 창립한 공해문제연구소였다.

6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개발로 발생한 환경오염 피해가 70년대에 들어서는 환경오염사고로 가시화했지만 주민들의 반발은 소규모에 그치는 상황이었다. 최열 전 환경연합 사무총장 등이 중심이 돼 명실상부한 전문 환경운동조직이 결성됐고 85년 온산공단 주변에서 발생한 온산병 사건을 사회 문제화하면서 본격적 환경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89년과 90년 수돗물 중금속 오염 파동과 91년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낙동강 페놀오염 사건은 환경문제가 남의 일이 아니라 국민 모두에게도 닥칠 수 있는 시급한 현안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는 계기였다. 여기에 92년 브라질 리우에서 열린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한 지구정상회담'은 전세계에서 일고 있는 새로운 환경 바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이런 흐름 속에서 각 지역 환경단체들이 93년 4월 한자리에 모여 전국적 환경단체인 환경연합을 탄생시켰다.

환경연합은 이후 94년 굴업도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 반대운동, 98년 동강댐 건설 백지화운동, 새만금 갯벌살리기 운동 등 굵직굵직한 환경현안을 제기하며 반핵운동과 에너지대안운동, 생태계보전운동 등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왔다.

공해추방운동연합과 8개의 지역 환경단체들이 결합했던 환경연합은 10년만에 52개 지역조직과 7개의 부설기관, 8만 7,000여명의 회원에 250여명의 활동가를 두고 있는 국내 대표적 환경단체로 성장했다.

/송용창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