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만 형사에게서는 냄새가 난다. 며칠 갈아입지 않은 옷, 전날 밤 숙취의 흔적, 니코틴과 땀이 뒤섞인 고약한 냄새에 세상과 적당히 영합하며 살아온 속물 냄새까지 겹쳤다. 아마 한국 영화에서 가장 사실적인 캐릭터로 남게 될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 형사 역은 역시 송강호(36)였기에 가능했다. '육감'을 중시하는 시골 형사 역을 위해 8㎏ 살을 찌운 것? 다른 배우들도 체중 조절은 많이 한다. 송강호의 연기는 지능범 같다. 의미 있는 대사를 그저 툭툭 버리듯, 지나가는 말 해버리듯 내뱉는다. 관객은 아마 자신만이 송강호의 재치있는 대사를 흘려 듣지 않았다고, 다른 사람은 그의 대사의 매력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의 대사에 걸려들지 않는 관객은 별로 없다."여기가 강간의 왕국이야?"(동료 형사를 강간범으로 착각, 몸을 던지며), "현장 보존 입빠이 해봐야 암껏도 없네."(물증 확보에 실패한 동료를 비아냥거리며), "맷정도 정이야"(자신이 범행을 조작한 피의자에게) 이런 대사를 그는 얼굴 색 하나 바꾸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해 낸다. 넋 나간 피의자와 함께 앉아 '수사반장' 시그널 음악의 봉고 연주를 손가락으로 흉내내며 "저건 노래가 좋아!"하고 말하는 것 하나로 인권이 유린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실제 이상으로 전해준다.
"예전에 연극을 할 때였어요. 소극장에서 공연하던 걸 대극장으로 옮겼는데, 한 배우가 그랬죠. 2, 3층 관객에게 목소리를 어떻게 전달할 것이냐고. 김석만 연출가가 이러더군요. 목이 졸려 죽어가는데 '살.려.주.세.요' 이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거냐고. 그건 소리 크기로 될 게 아니라고. 절실함이 있다면 그런 건 다 표현되는 것이라고." 물론 관객이 중요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별 것도 아닌 것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그는 이 방식의 '진정성'을 믿는다.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는 토스와 스파이크를 척척 해내는 배구 선수처럼 호흡이 맞았다. 생생한 대사나 연기를 중시, 박두만의 대사는 대부분 송강호 식으로 바꾸었다. 감독은 그렇게 배우의 공간을 열어두고 "배우의 장점 10가지를 다 뽑아먹는 감독"이 됐다. "봉 감독의 치밀한 계산은 천재가 아니면 어려워요. 배우에게 직접 얘기도 안 하고 우회적으로 슬쩍 전달하죠. 배우에게 공간을 만들어줘요. 그런데 그게 골치 아파요. 어휴, 감독이랑 머리 싸움하느라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어요."
서울 형사에 대한 열등감을 가진 시골 형사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감독이 지능범인 게 말이에요. 서태윤 역의 김상경과 처음 찍은 장면이 그를 강간범으로 오인해 차버리는 장면이었어요. 그러니까 평소에는 멀쩡하다가도 촬영에만 들어가면 묘한 긴장감이 생겨나더라구요."
높은 톤으로 "히히히히" 하며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것을 빼고는 지극히 정상(?)으로 보이는 송강호. 성격은 오히려 내성적이라는 그는 "정서적으로 쎈 영화"를 좋아한다. 물론 부담스러운 캐릭터를 자기 식으로 곰삭이는 것도 그가 즐기는 일이다. '반칙왕' 'YMCA 야구단' '복수는 나의 것'이 그랬고, 그리고 연말 님 웨일즈의 원작을 정지영이 영화화한 '아리랑'에 혁명가 김산으로 출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 '살인의 추억'이나 '아리랑'처럼 누구나 알고 있는 얘기를 영화로 하는 것은 어렵다는 걸 알죠. 뻔히 상업적으로 성공할 것 같지만, 의미 없는 영화에는 끌리지 않아요. 그건 풀빵 찍는 것과 똑같지요. 그렇게 배우 생활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분노 스트레스도 배우로서의 에너지원이 되는 것 같다는 송강호. "영화 촬영 전 사건의 희생자들을 위한 천도제를 지내 마음의 짐을 덜게 된 것 같다"는 그는 사막처럼 메말라 있는 '복수는 나의 것'의 동진도, 보이지 않는 살인범에 연패한 시골 형사 박두만도, '인생 역전'하라고 로또 복권을 권하는 남자도 아니었다. 그는 그 모든 캐릭터를 합쳐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그런 것들과는 전혀 관계없는 인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참 묘한 남자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사진 최종욱기자
● "살인의 추억"은 어떤 영화
속절없이 돌을 던진 판을 복기(復碁)하는 패배한 기사의 심정은 어떨까. 미제 사건을 소재로 삼은 '살인의 추억'(감독 봉준호)은 그런 심정에서 출발한다. 1986년부터 5년간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반경 2㎞에서 6년간 10차례의 강간 살인 사건이 발생했고, 연인원 180만 명의 경찰이 3,000명의 용의자를 훑었으나 아무런 단서를 잡아내지 못했다.
영화의 축은 지역 토박이인 박두만(송강호), 조용구(김뢰하) 형사, 서울시경에서 자원해 온 서태윤(김상경) 형사와 세 용의자. 박두만은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하라"스타일의 육감을 믿는 형사, 조용구는 용의자 얼굴에 상처를 내지 않기 위해 구두에 발토시를 끼는 구타 형사, 서태윤은 "서류는 절대 거짓말 안 한다"고 믿는 과학 수사의 신봉자. 피해자를 졸졸 쫓아다녔다는 '덮쳐라 백씨' 집안의 백광호(박노식), 변태성욕자 조병순(류태호), 그리고 살아남은 피해자의 묘사처럼 "손이 부드러운" 공장 기술자 박현규(박해일)가 차례로 용의선상에 오른다.
백광호와 조병순을 범인으로 몰려는 박두만의 억지가 80년대 허술한 시대상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며 관객에게 블랙 코미디의 재미를 선물하는 반면, 박현규가 범인이란 심증이 확고한 서태윤이 "자백만 있으면 된다"고 반쯤 미쳐갈 때는 관객도 분노로 속이 탄다.
범인을 못 잡는 이유는 다양하다. 현장 보존이 안돼 경운기로 범인 발자국을 뭉개 버리고, "털끝 하나 남기지 않았다"며 무모증 환자를 찾아 다니는 한심한 형사가 있으며, 청원경찰은 수원으로 대학생 시위를 진압하러 나가야 했다.
영화는 우리나라 경찰의 전근대성에만 귀책사유를 묻지 않는다. "여기는 민방위 본부입니다. 훈련공습공보를 발령합니다"로 시작하는 민방위 훈련이 벌어지는 사이에 여자들은 죽어가고 있었다. 이념의 적을 상대하는 동안, 가까운 적은 희생자를 사냥하고 있었다.
미제 사건으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란 힘든데도 '살인의 추억'은 관객을 영화에 빠져 들게 하는 대단한 힘을 갖고 있다. 사실적인 형사 캐릭터에 일상적인 대사, 범인으로부터 우롱당하는 형사와 관객이 일체감을 갖도록 한 노련한 연출력 때문이다. 감독의 주문대로 '고속버스 기사를 연상시키는' 형사 의상이나 논둑길 나무에 링거병을 걸고 주사를 맞는 형사와 그의 애인 등 낭만적 설정(원작자 김광림씨는 이 장면을 가장 인상적인 영화적 설정으로 꼽았다)까지 눈길을 끈다.
연쇄살인사건과 그것을 풀지 못한 시대적 이유를 간접화법으로 전하면서도 희로애락의 극한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한 감독의 연출력에 두 손을 들 수밖에 없다. 25일 개봉.
/박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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