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일종의 흥분 상태에 빠지게 되는 영화를 만난다. 그럴 때면 그들이 마치 내 작품인 양 착각하기도 하고, 평론가로서 일말의 보람과 행복감마저 맛보곤 한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 그런, 지독한 매혹의 영화다. 영화는 플롯에서 성격화, 연기, 촬영, 음향효과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신예답지 않은 거의 완벽한 수준을 구현한다. 비범함은 그러나 텍스트 표면이 아니라 이면에 자리한다. 사건 해결에 급급하기 십상인 여느 범죄·심리 스릴러와는 달리 이 영화는 장르 고유의 영화적 재미·감동을 전하는 선에서 만족하지 않고, 사건에 연루된 형사들, 즉 (보통) 사람들의 일상과 내면, 애환을,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극히 초라하면서도 폭력적이었던 시대의 아픔과 슬픔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데까지 나아간다.우리에게 과연 이런 영화가 있었던가? 내가 그토록 열광했던 '복수는 나의 것'(감독 박찬욱), '오아시스'(이창동), '8월의 크리스마스'(허준호) 등, 그 어느 문제작도 이런 '경지'를 성취하진 못했다. 지금도 그들 속에서 설명하기 쉽지 않은 어떤 부재 내지 결핍을 느끼기에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도 그 명장들을 합친 진정한 '앙팡 테리블'이 탄생한 건 아닐까? 다분히 과장이요, 평론가 특유의 호들갑이라고 힐난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흠 아닌 흠을 굳이 잡는다면 대중 영화치고는 주제나 분위기가 다소 무겁고 암울하게 비칠 수 있다는 것 정도이다. 그런 분들에겐 '보리울의 여름'(이민용·사진)을 권한다. '동갑내기 과외하기'에 이은 또 한편의 유쾌한 건강 휴먼 코미디. 노골적 계몽성이 눈에 거슬리긴 하지만 보리울 촌구석에서 펼쳐지는 어린 꿈나무들의 축구 경기는 말할 것 없고, 불교와 천주교 사이의 팽팽한 긴장과 그 긴장을 넘어 화해에 이르는 과정 등 볼거리가 풍성하다. 언뜻 땡중 같지만 실제론 만만찮은 내공을 지닌 우남 스님(박영규)과 원칙과 탄력성을 겸비한 미남 김 신부(차인표) 간의 캐릭터 및 연기 대결, 조화가 특히 인상적이다. 아역 출연진의 실감 연기도 그렇고.
좀처럼 보기 어려운 수작 다큐멘터리 한 편 보는 것도 권할 만하다. 어지간한 극영화의 재미를 능가하면서도 시종일관 현실·사회 고발성 다큐 특유의 문제의식을 잃는 법이 없는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 1999년 4월20일 미국 콜로라도 리틀톤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 난동 사건을 계기로 총기류에 중독된 미국 사회의 폐부를 통렬하게 조롱·비판하는 영화에 열광하지 않고는 못 배길 듯싶다. 부시를 비롯한 상당수 미국인들이 왜 그렇게 전쟁에 열중하는가를 제시하는 감독의 설명에는 감탄이 절로 나올 법도 하고. 지나치게 주관적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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