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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정부 비화 대통령의 사람들]<8>권력의 균열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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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정부 비화 대통령의 사람들]<8>권력의 균열 ⑤

입력
2003.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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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김은성(金銀星) 2차장은 승진한 직후인 2000년 5월 초 최규선(崔圭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최규선은 그 때 권노갑(權魯甲) 민주당 상임고문의 보좌역으로 있을 때였다. 최규선은 "승진했으니 어른(권 고문)을 한 번 뵙고 인사를 하라"고 말했다. 김 차장은 "당연히 찾아 뵙겠다"면서 시간을 잡아달라고 부탁했다.최규선은 권 고문에게 자신이 먼저 전화한 사실은 숨기고 "김 차장이 인사 드리러 오겠답니다"라고 보고했다. 권 고문은 김 차장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기 때문에 별도의 식사나 면담 대신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일정 속에 잠깐 보기로 하고 "5일 신라호텔로 오라"고 말했다.

그날 신라호텔에서 최규선은 김 차장을 권 고문에 곧바로 데려가지 않고 먼저 만나 벼르던 얘기를 꺼냈다. 최규선은 DJ의 3남 홍걸(弘傑)씨와 자신의 관계를 경고하는 보고서를 올린 국정원 K씨(4급)를 거론했다. 최규선은 "K가 여권 주요 인사들에게 '김 차장이 승진하면 안 된다'고 얘기하고 다녔다. 그 친구는 평판이 안 좋고 반 동교동계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김 차장은 K씨가 자신의 차장 승진을 반대했다는 말에 기분이 언짢았다.

그리고 김 차장은 커피숍으로 가서 권 고문을 만났다. 권 고문은 김 차장의 기대와는 달리 다른 손님을 만나다가 악수만 하고 "열심히 하라"고 말했다. 정보기관의 국내 총책임자로 목에 힘을 주던 김 차장은 권 고문의 의례적인 응대에 당황했다. 김 차장은 권 고문의 냉대가 부하 직원인 K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권노갑씨의 회고. "야당 시절 국회 정보위에서 김은성을 처음 알았다. 그 때 김은성은 안기부에서 파견된 정보위의 수석 전문위원이었다. 국정원 직원들을 보면 과거 물고문을 당한 기억이 되살아나 잘 대해 줄 수가 없었다. 더욱이 김은성은 눈을 자주 깜박거려 신뢰감을 주지 못했다. 조금만 선입견이 좋았다면 예우 차원에서 손님을 잠시 비끼게 하고 차 한 잔이라도 함께 했을 것이나 그러지 않았다."

김 차장은 다음 날 출근해 단장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K씨를 거론하며 "그 XX, 헛소리나 하고 다니고, 잘라버려"라고 고성을 질렀다.

K씨의 증언. "5일부터 3일간 휴가를 갔다가 돌아와 보니 난리가 났더라. 주변에서 '김 차장이 너를 찍었다. 제주도로 보내라는 얘기가 있다'고 전해주었다. 위에서 '목표(출입기관)를 바꾸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일단 버텼다. 버티면서 최규선과 김홍걸의 관계를 계속 추적, 보고서를 올렸다. 그러다 결국 7월 8일 출입처를 민주당에서 감사원으로 옮겼다."

김 차장은 K씨의 출입처를 감사원으로 바꾼 뒤 7월 14일 권 고문의 집으로 찾아간다. 권 고문을 다시 찾은 이유는 홍걸씨가 DJ에 올라간 국정원의 보고서에 대해 불 같이 화를 냈기 때문이다. 권 고문을 설득, 파문을 진화하기 위해 찾아간 것이다.

홍걸씨가 국정원 보고서의 내용을 알게 된 것은 권 고문을 통해서 였다. 권 고문은 7월초 DJ로부터 호출을 받는다. DJ는 "국정원 보고서를 보니 홍걸이와 최규선 문제가 걱정스럽다"면서 "최규선이 홍걸이와 자네를 팔고 다닌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잘 타일러서 단속해달라"는 당부도 했다. 권 고문은 "그 보고서는 엉터리입니다"라고 말했다.

권 고문은 청와대에서 돌아와 곧바로 김홍걸과 최규선을 불렀다. 권 고문은 "김은성이 엉터리 보고를 만들었고 그 보고서가 임동원(林東源) 국정원장의 주례 보고 때 대통령에 전달된 모양이다. 확인하고 사실이 아니면 따져라"고 말했다.

홍걸씨는 김 차장에 전화를 걸어 항의했고 임 원장도 만났다. 김 차장은 겁을 먹었고 홍걸씨와 롯데호텔에서 만나 경위를 설명했다. 혼자 나가기가 불안해 동교동계와 가까운 국정원 Y과장, Y과장과 친한 최재승(崔在昇) 의원과 함께 홍걸씨를 만났다. 그 자리서 김 차장은 홍걸씨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K씨는 출입처를 옮겼으나 그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몸이 달은 김 차장은 임 원장과 상의, 권 고문을 직접 찾아가 설득하기로 했다. 김 차장은 사전에 연락하면 권 고문이 오지 말라고 할 것을 우려, 예고 없이 방문하기로 했다. 김 차장은 권 고문 보좌관인 윤창환씨의 대학 후배인 부하 직원 M씨(사무관)를 시켜 집을 미리 알아놓는 예행 연습까지 했다.

김 차장이 14일 도착했을 때 권 고문은 용평 골프장으로 떠나려던 참이었다. 권 고문은 "웬일이냐"고 물었고 김 차장은 노란 봉투를 내놓으면서 "청와대에 올린 보고인데 해명하러 왔다"고 말했다. 권 고문은 "당신 보고는 엉터리다. 대통령 아들을 문제 삼으려면 증거를 내놓아야지, 증권가 루머 수준의 얘기를 보고하면 되느냐. 그 많은 예산을 쓰면서 증거 하나 못 내놓느냐"고 호통을 쳤다.

김 차장은 소득 없이 돌아갔다. 그러나 곧바로 반전의 기회가 생긴다. 감사원을 출입하던 국정원 K씨는 그 즈음 최규선이 대통령 특보, 보좌관 행세를 하며 공항 귀빈실을 이용하는 사실을 확인해 또 다시 보고서를 올린 것이다. K씨는 "최규선은 외국에서도 그렇게 행세했다. 미국의 경우 대통령 안보보좌관하면 얼마나 센 자리인가. 미국 사람들은 최규선을 그렇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K씨 보고서에 이어 8월 중순 MBC가 최규선의 대통령 특보 사칭 사실을 보도하면서 권 고문도 최규선에 대해 파문 조치를 내린다.

권노갑씨의 얘기. "MBC 보도를 보고 홍걸이와 최규선을 불렀다. 둘 사이 인연을 끊으라고 했다. 최규선에게 '이제 너는 네 갈 길을 가라. 더 이상 정치권에 발 붙이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 때 둘이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왈리드 왕자를 만나러 갈 예정이었는데 못 가게 했고 홍걸이는 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최규선은 홍걸이에게 접근, 계속 만났더라."

국정원 보고서 파문은 권 고문이 최규선을 공식적으로 내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DJ와 이희호(李姬鎬) 여사는 우환거리를 덜어내자 국정원을 칭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파문의 과정을 보면, 임기 말 대통령 아들들이 구속되는 비극을 막지 못한 원인을 찾아낼 수 있다. 무엇보다 정보기관의 주요 책임자가 자신의 구명을 위해 권력 실세들에게 줄을 대는 상황은 국가 시스템에 고장이 생겼음을 의미한다.

우선적으로 대통령에 책임이 있다. DJ가 국정원의 보고를 접하고 권 고문이나 아들에게 묻지 않고 사정기관을 통해 치밀한 내사를 벌여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그렇다고 DJ가 아들들 문제에 관대했던 것은 아니다. 임기 초 박주선(朴柱宣) 비서관에게 "현철(賢哲·YS 차남)이 전철을 밟지 않도록 엄하게 대하라"는 지침을 여러 번 주었다. 또 차남 홍업(弘業)씨와 관련된 첩보를 들으면 즉시 전화를 걸어 꾸짖는 경우가 여러 차례 목격되곤 했다.

박준영(朴晙瑩) 전 청와대 공보수석의 증언. "2000년 후반 대통령은 홍업씨 관련 소문을 듣고 나에게 '들은 적이 있냐'고 물었다. '들었다'고 했더니 '왜 보고 안했느냐'고 엄하게 꾸짖었다. '조사해보니 사실이 아니어서 보고 안 했다'고 답하니까 그 자리서 대통령은 홍업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위를 묻고 홍업씨 답변을 들은 뒤 '장관 수석들이 다 있으니 국정에 관해 개입도 말고, 알려고도 말아라. 소문이 나오지 않도록 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들을 이기는 아버지가 없다'는 말처럼 DJ도 그랬다. 개인적인 타이름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공적 기관을 통해 아들들 주변의 정치 브로커들을 박멸했어야 했던 것이다.

권 고문도 큰 책임이 있다. 정권을 뒤흔든 문제 인물을 가려내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엄호한 셈이 됐기 때문이다. 김 차장의 이중성과 부도덕성도 문제를 악화시켰다. 김 차장은 홍걸씨에 대한 보고서를 올리는 시점에 훗날 게이트의 당사자인 진승현(陳承鉉)의 돈을 받고 비호하고 다녔다. 본인의 뒤가 구렸기 때문에 권력 실세들의 비난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본질과는 관계없지만 이 파문에는 한 가지 미스터리가 남아 있다. 나중에 진승현 게이트로 구속된 김 차장이 이날 권 고문에게 진승현 돈 5,000만원을 주었다고 진술, 권 고문이 구속된 것이다. 현재 권 고문 변호인단과 검찰 간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고 있으며 얼마 전(4월 16일) 2심 재판부가 선고에 앞서 현장검증까지 했다.

김 차장이 대통령 아들의 문제점을 얘기하면서 진승현의 구명을 위해 돈을 건넨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 또 김 차장이 그 날 진승현이 권 고문 집에 갔다고 증언했으나 현장의 그 누구도 진씨를 보았다는 사람이 없다. 법적인 진실은 조만간 재판부에 의해 가려지겠지만 의문이 많이 남는 사건이다. 김은성 개인의 보복인지, 다른 보이지않는 '손'의 작용인지, 아니면 정말로 권 고문의 혐의가 사실인지 좀더 내밀하게 살펴보아야 할 대목이다.

/이영성기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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