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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비극과 멍에 안긴 고장신호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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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비극과 멍에 안긴 고장신호등

입력
2003.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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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난 신호등 때문에 서로가 결국 피해자가 된 셈이니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22일 아침 경기 성남시 분당구 제생병원 영안실. 고장난 신호등의 녹색불을 보고 횡단보도를 건너다 변을 당한 오모(72)씨의 아들 상균(39)씨는 밤새 빈소를 지키던 가해자 박모(37)씨에게 도리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닙니다, 제가 조금만 조심운전을 했어도 사고는 없었을 텐데…"라며 울음을 터뜨리며 면구스러워했다.

두 가족의 불행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20일 오후 7시께 어처구니 없는 사고에서 비롯됐다.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 구 경마장 앞길에서 녹색 신호등을 보고 횡단보도를 건너던 오씨가 역시 녹색 신호등을 보고 원효대교 방향으로 달리던 박씨의 승용차에 치여 숨진 것. 경찰조사 결과 보행자용과 차량용 신호등에 동시에 녹색불이 켜진 어처구니 없는 상황은 이날 내린 비로 누전현상이 생기면서 전자신호제어기가 고장나 빚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날 휴일을 맞아 서울 옥수동에서 홀로 지내는 아버지를 모시고 경기 군포시 집 방향으로 가던 길이었던 박씨는 "휴일마다 아버지를 모시러 오가는 길이어서 워낙이 눈에 익숙한 길이었다"며 "신호등이 고장나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허탈해 했다. 오씨의 외아들 상균씨의 마음은 더 통절하다. 노총각으로 직장생활을 하다보니 홀아버지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자책 때문이다. 이날도 오씨는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용산역광장에서 동네 노인들과 시간을 보내다 귀가하던 중이었다. 상균씨는 "올해 안으로는 가정을 꾸리고 아버지에게 손주도 안겨주고 싶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박씨는 일단 사망사고를 냈기 때문에 교통사고처리특례법의 보행자보호의무 불이행 위반으로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경찰은 그러나 사고당시 신호등이 고장난 상태였기 때문에 신호가 없는 횡단보도 상의 사고로 처리할 방침이다. 용산경찰서 관계자는 "박씨의 경우 고장신호등으로 인한 피해자이지만 결과론적으로 가해자로 취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며 안타까워했다.

/박경우기자 gw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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