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련 반체제 인권운동의 상징 인물인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 미망인 엘레나 보네르 여사가 러시아 정부가 추진중인 남편의 기념관 건립에 반대의사를 밝혔다. 러시아 하원은 박사의 탄생 81주년을 맞아 기념관 건립을 결정했고, 모스크바시는 이를 위해 예산확보 등을 위한 시의회 승인을 얻었다. 정치인 문화인 등 사회 저명인사로 구성된 기념관 건립 추진위까지 발족했다. 남편의 기념관을 세워주겠다면 가장 기뻐해야 할 사람이 바로 미망인 일터인데 보네르 여사의 결정은 의외다.■ 보네르 여사는 러시아의 현실이 남편이 추구해 온 조국의 발전 방향과 맞지 않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었다. 자신도 저명한 인권운동가이고, 지금도 활발한 인권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수긍이 간다. 보네르 여사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이끄는 러시아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인권이 실종된 체첸 전쟁의 계속, 가난한 민중의 삶, 겉치레 뿐인 선거와 수시로 자행되는 언론탄압, 권력에 종속된 종교 등이 보네르 여사가 비판하는 러시아의 현주소다. 사하로프 부부가 비밀경찰(KGB)의 손에 의해 유배생활을 할 때 푸틴은 바로 KGB 요원 이었다. 보네르 여사는 "기념관 건립은 남편의 삶을 왜곡하는 것"이라며 "과거에 존경을 받았던 남편이 조국의 기억에서 희미해진 지금, 기념관 건립은 러시아가 지금까지 일 삼아온 거짓말에 또 다른 하나를 보태게 될 뿐"이라고 말했다. 보네르 여사는 한국 출판사 초청 등으로 우리나라를 두 차례 방문 했다.
■ 러시아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하로프 박사는 국외추방을 거부하고 유배생활을 하며 단식 등을 통해 소련의 독재에 항거했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는 같은 반체제 인사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과 비교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솔제니친은 조국을 떠나 미국의 버몬트주에서 생활했지만, 사하로프 박사는 조국을 등지지 않고 유형지에서 민중들과 애환을 같이 했기 때문이다. 애국심이 강한 러시아인들은 조국을 등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1989년 타계한 그는 러시아 여론조사에서 레닌과 스탈린에 이어 '20세기 러시아인'에서 3위를 차지했다.
■ 러시아 언론은 보네르 여사의 동의가 기념관 건립에 필수적은 아니라고 말한다. 미망인이 반대하는 가운데 사하로프 박사의 기념관이 세워질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보네르 여사의 결정은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는 많은 유가족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기념관은 고인의 유지(遺志)와 맞아 떨어질 때 빛을 발한다는 사실이다.
/이병규 논설위원 veroic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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