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교육, 특히 대중 음악 교육이란 책을 통해서 나오는 게 아니다. 대중 음악에 아무리 상업성이 판을 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육까지 거기에 점령될 수는 없다. 제대로 가르치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제대로 가르치는 데에는 오랜 경험에서 우러 나온 쉬운 길을 학생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나는 강의를 듣기 위해 모인 귀여운 학생들에게 뭣보다 제대로 가르치려 애썼다. 기성인 뺨치는 연주 실력에다, 배우려는 열의로 뭉친 그들도 무대 위주의 내 수업 방식을 무척 반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교편을 잡는다는 것은 새 작품을 창조하고 무대에서 평생을 보내면서 자연스레 생성된 나의 본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이었다.
현실적으로 학과장이 된 것이 큰 문제였다. 오전 7시에 서둘러 나가, 학생들과 부대끼다 오후 8∼9시나 돌아 오는 생활이 연속되다 보니 내 음악을 할 짬이 전혀 나지 않았다. 학교에서 맨날 기초 타령만 하고 있으려니,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갑자기 엄습했다.
교수로 늙어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절로 치밀어 올랐다. 사실 평생동안 내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다 죽는 것이 내 꿈이지 않았는가. 학생들이 예쁘긴 했지만, 교육이란 이름 아래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려니 차라리 지옥 같기도 했다. 그렇게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은 캠퍼스 바깥, 즉 일반 음악 세계와는 철저히 단절되고 있다는 자각때문이기도 했다.
따지자면 내가 만든 학과인 만큼 더욱 가꿔나가야 할 책임이 분명히 있었다. 고민하다 고육책으로 생각해 낸 핑계가 과로였다. 사실 체력이 많이 약해져 있기도 했다. 과로 탓에 극도로 허약해졌으니 의사가 입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진단을 내렸다며 둘러 대고 나왔다. 음악 교육에 종사하던 시절, 이렇다 할 연주는 물론 나는 단 한 편의 곡도 못 썼다. 그것은 전례 없던 위기 상황이었다.
그래서 1998년 교편을 던지고 만든 것이 서울 송파구 문정동의 '신중현 음악 세계'다. 학교를 마친 것과 거의 동시에 세웠는데, 그것은 재직 중에 나름의 복안이 제법 서 있었던 덕택이다. 세상은 몇 년 전부터 인터넷 천지로 색깔을 바꾸고 있었다. 두루넷을 통해 인터넷의 실체와 위력을 충분히 접했던 나는 나의 도메인(www.sjhmvd.com)을 만들어 등록시켰다. sjh란 물론 신중현이란 이름 석자의 이니셜이고, mvd란 뮤직(music) 비디오(video) 디지털(digital)의 이니셜이다. 머잖아 인터넷 시대가 닥쳐 온다는 나의 확고한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컴퓨터 음악이나 인터넷과의 인연은 이미 84년 방배동에서 홀로 작업할 때 맺어졌다. AFKN에서 이전에는 들어 보지 못 한, 굉장히 특이한 음악이 흘러 나오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말로만 듣던 컴퓨터 뮤직이구나, 하고 직감했다. 인간이 아니라 분명히 물체가 음악을 하는데, 나름대로 울부짖는 것이었다. 인근 서초동에 있는 한 컴퓨터 뮤직 전문업체에 심심풀이 삼아 나가면서 알게 된 바로 그 미증유의 음악이었다. 그 속내를 파고 들어가니, 혼자 할 수 있는 작업의 최대치가 구현돼 있었다. 나의 신념으로 굳은 '홀'의 세계를 훌륭하게 구현할 수 있는 놀라운 장치였다. 이후 모든 음악 작업을 혼자 다 감당할 수 있었던 게 결국 컴퓨터 덕분이다.
현재 일반화된 16비트 컴퓨터에 비해 수준이 크게 떨어지는 8비트짜리 IBM 컴퓨터였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음의 신천지를 내 앞에 펼쳐 보였다. 기존의 줄 악보는 없이 A4, B6 등 숫자로만 이뤄진 악보를 입력하면 모듈(음원)에 들어 있는 소리를 찾아 내 고스란히 음악으로 재현해 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국내 최초의 미디 작업이었다. 나의 히트곡들을 그렇게 숫자로 변환시키면 컴퓨터가 알아서 음악으로 만들어 주었다.
물체가 울부짖는다는 것은 분명 나에게 매력으로 다가 온 것이었지만, 똑 같은 이유 때문에 한계가 분명히 있었다. 아무리 잘 해도 기계가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은 여전했다. 영혼이 없는 죽은 음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름의 절충안에 다다르게 됐다. 컴퓨터란 인간이 시키는 일만 하므로 녹음 등 구체적 작업만 맡기자는 것이 나의 경험적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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